햇살은 슬몃슬몃 다가오지 않는다. 플래시의 불빛처럼 어느 순간 발코니를 차지한다. 오전의 햇살은 아직 덜 익어서 풋풋한 느낌이다. 발코니 마루에 앉아 세상에 가득한 봄의 이야기를 듣는다. 연둣빛 이야기를 쏟아내는 나무는 가지를 쳐들어 기웃거린다. 창을 열면 금방이라도 불쑥 들어올 얼굴이다. 나무는 내려앉는 햇살의 무게를 다 받아내고서도 잔잔한 웃음을 짓는다. 새소리 한 자락 들려왔으면.
커피 향이 좁은 발코니를 가득 채운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연둣빛으로 물든 바람이 창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 바람을 마신다. 흩어지는 커피 내음. 상쾌하다.
아내가 바리스타 자격증을 받았다. 4개월 동안 초등학생처럼 다소곳하게 문화센터를 드나들더니 필기시험, 실기시험 모두 만점을 받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심사위원이 엄지를 들어 보이며 만족한 웃음을 건넸단다. 그리고 금빛을 두른 자격증과 잘 볶은 커피콩을 한 봉지 받아 왔다. 나름 유명하다는 상표를 달고 있다고 아내는 싱글벙글이다.
대학생이던 70년대에는 프림을 넣어 마셨다. 좀 웃기는 게 우리나라는 외래어를 제멋대로 만들어 사용해 버린다. 우리는 ‘프림’이라고 부르지만 영어로는 보통 creamer, Coffee-mate, 또는 커피색을 연하게 해 준다는 뜻으로 Coffee Whitener라고 부른다. 우리는 식물성 커피 크림의 한 브랜드인 Frima에 사로잡혀 ‘프림’이라고 부른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잔잔하게 흐르는 다방에 점잖을 빼고 있는 어른들이든, 거센 음악이 몰아치는 음악다방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젊은이든 모두 프림을 넣은 커피잔을 들었다.
‘다방’이라는 간판을 ‘카페’로 바꿔 달기 시작하면서 소위 ‘원두커피’가 점령군처럼 밀려 들어왔다. 영어로 된 이름을 내세운 카페가 세상 곳곳에 주둔했고,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라테’ 같은 이름을 써넣은 메뉴판이 등장했다. ‘원두커피’, ‘핸드드립’, ‘더치커피’ 같은 말은 가정으로 파고들었고, 우리나라는 커피 공화국이 되어갔다. 그리고 ‘양촌리’라는 말도 따라붙었다. 70년대의 프림을 넣어 마시던 커피가 시골스럽다는 뜻으로 ‘전원일기’의 배경인 농촌 마을을 내놓은 것이다.
아내가 에스프레소를 이야기한다. 에스프레소는 높은 압력으로 짧은 순간에 커피를 추출하는 아주 진한 이탈리아식 커피란다. 전용 기계를 사용하여 9 기압 정도의 압력, 90℃ 정도의 온도에서 25초 정도에 25㎖를 뽑아냈을 때 최고의 맛을 낸다고 한다. 에스프레소의 꽃은 크레마(crema)라는 옅은 갈색의 크림층이란다. 크레마(crema)는 커피 원두에 포함된 오일이 증기에 노출되어 표면 위로 떠오른 것으로 커피 향의 근원이라고 한다. 어리둥절한 나에게 데미타세(demitasse)라는 에스프레소 전용 잔을 말해 주었다.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사람들이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을 보았다. 베니치아에서 화장실을 이용할 목적으로 카페에 들어갔다. 에스프레소가 1유로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에스프레소를 주문한 우리는 한 모금 마시고 그 작은 잔을 내려놓고 말았다. 너무 농도가 짙어 감당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아내가 추출해 온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넣어 내민다. 아메리카노란다. 바리스타 아내 덕분에 커피를 마신다. 마신다기보다는 커피 향을 즐긴다. 발코니에 내려앉는 햇살을 받는다. 진동규 시인의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을 읽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진동규
솔 꽃가루 쌓인
토방 마루
소쩍새 울음 몇
몸 부리고 앉아
피먹진 소절을 널어
말립니다.
산발치에서는 한바탕
보춘화 꽃대궁 어지럽히더니
진달래 철쭉 몸 사르더니
골짝 골짝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쌓인 송홧가루
밭은기침을 합니다.
꽃이 피고, 봄을 못 이긴 소쩍새가 피먹진 울음을 울어대는 봄날, 세상은 온통 봄기운에 눌리고 있다. 봄날은 그리움으로 물드는 날이다. 겨우내 땅속에 갇혀 있었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솟아나는 게 봄이다. 그 목말랐던 그리움을 보춘화의 흰 꽃으로, 진달래 철쭉의 붉은 꽃잎으로 토해내는 게 봄날이다. 하늘을 돌아내리는 햇살까지 더해 세상을 울렁이게 하는 게 봄날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이라고 한다. 소나무 꽃이 코끝을 간지럽힌다고 기침이나 해대는 게 사람이란다.
봄날에는 한 잔의 커피를 마셔야 한다. 연둣빛 나뭇가지를 따라온 바람은 이럴 때 불어야 한다. 보춘화, 진달래 꽃잎의 노래를 한 아름 들고 온 봄바람은 카피향만큼이나 상그럽다. 아메리카노든, 양촌리 달달한 커피든 한 잔 들고서 창가에 앉아야 한다. 그렇게 봄을 마셔야 한다. 꽃잎을 타고 흐르는 그리움을 마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