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은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책을 읽으러 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도서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당 벤치에 앉아 시내를 내려다본다. 도서관에서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 좋다. 책이 지혜의 근원이라면 도서관이 세상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도 그럴듯하다는 생각이다.
도서관은 언제나 고요가 첩첩이 쌓여 있다. 발소리를 죽여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가 2층의 자료실로 간다. 개가식 서가이므로 소장하고 있는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어서 좋다. 빌리려는 책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왔기 때문에 책이 있는 위치를 바로 찾을 수 있다. 오늘 빌리려는 책은 인간관계 전문가인 양창순 박사의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이다. 분류기호가 ‘189.2’이므로 철학 서가로 간다. 바로 책을 찾지 않고 서가를 천천히 훑는다. 개가식 서가가 좋은 점이다. 미리 정해 놓은 책이 아닌 다른 책까지 모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가를 따라 살펴보다가 더 마음에 든 책을 발견했다. 양창순 박사가 쓴 『나는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이다. 사랑이 서툰 이들에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에 매몰되지 않는 건강한 관계 맺기를 위한 연애전략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미혼인 아들에게 권하고 싶다. 책을 좋아하는 아들은 어쩌면 읽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문학책이 소장되어 있는 800번대 서가 앞에 이르자 묵은 책내음이 밀려든다. 곰팡이가 핀 것은 아닐지라도 색깔이 누렇게 변해버린 채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이 있다. 느닷없이 박계형의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1964년 동양방송 개국 기념 현상 공모에 당선된 장편 소설이다. 당시 장안의 지가(紙價)를 올렸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세상을 들썩였던 작품이다. 중학생 때 수업 시간에 책상 속에 숨겨 몰래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윤희>라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로 질병으로 죽어가는 장면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그때부터 소설을 많이 읽었다. 물론 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을 빌려 읽은 게 전부였다. 알퐁소 도테의 『별』, 황순원의 『소나기』도 그때 읽었다. 김래성의 추리소설 『황금박쥐』를 읽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자지 못했었다. ,
중학교 때 도서관에 처음으로 들어가 봤다. 특별활동 시간에 도서부에 들어갔는데, 담당 선생님이 친구와 나를 불러 도서관 청소를 시켰다. 우리는 청소는 슬렁슬렁하고, 서가 밑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읽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날은 최고의 기분이었다. 당시에는 집이 가난하여 책을 산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었다. 우리 집에는 『헬렌 켈러』라는 책이 있었는데 앞뒤의 표지는 말할 것도 없이 중간의 책장도 찢어져 있었다. 워낙에 많이 읽어 책장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헤어져 있었다. 그래도 읽고 또 읽었다. 애니 설리번 선생님이 눈이 안 보이고, 귀가 들리지 않으며 말도 할 수 없는 7실의 헬렌 켈러에게 물을 만지게 하고, 냄새를 맡게 하고는 손바닥에 ‘물’이라고 써주면서 사물의 이름을 가르쳐 주는 것을 보고 온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감동에 빠졌었다.
도서관이 가깝게 있다는 것은 참 복 받은 일이다. 책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책도 많지만, 도서관에 가면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책들을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의외의 책을 발견했을 때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세상으로 들어가는 그 느낌은 몸으로 느껴봐야만 안다.
조벽 교수의 『나는 대한민국 교사이다』라는 책을 보았다. 이미 교단에서 내려오고 난 후에 넘겨보았던 책. 부끄러웠다. 나는 교사가 아니라 37년 동안 교사 흉내만 내고 있었던 것이다. 책은 영원한 스승이고, 도서관은 삶의 보고이다.
서가 옆에 열람용 탁자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 시쳇말로 멍 때리고 있는 것이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잡념에 짓눌린다.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잡념들을 가닥가닥 움켜쥐고 흔들어본다. 버팅기는 잡념에 와르르 무너진다. 견디지 못하고 서가에 가서 책을 뽑아온다. 정여울 작가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절망의 시간에 문학은 더욱 의미가 있다”는 작가의 일갈을 마음에 담는다. 책장을 넘기는 시간만큼은 머릿속이 가지런해진다. 창밖으로 하늘이 참 곱다.
책은 날개가 있어서 좋다. 책을 가득 담고 있는 도서관에서는 그래서 하늘 높이 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