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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Oct 09. 2023

4화 묵호항 논골담길이 내놓는 이야기

나의 몇 걸음


작은 골목, 논골담길을 따라 걸어본다. 일반적으로 항구에는 꼭 이런 비탈길이 있다. 뱃사람들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나는 길이다. 그들은 어쩌면 울며 걸었을 길을 나는 헤살거리며 걷는다. 유람의 걸음이지만, 마음을 가다듬으며 걸어야 한다. 그러나 유람의 걸음은 자꾸만 가벼워진다.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으로만 걷는다.





너무 늘어놓았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만들어 놓았다. 이런 곳에서 저것이 무엇이고, 이것은 어떤 것을 형상화하려고 했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바라보고, 바라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나무 조각 하나에 숨을 불어넣은 작가의 마음을 헤아리지 말아야 한다. 그냥 내가 만들어 놓은 내 마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행의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나는 그렇게 여행지를 돌아다닌다.


카페이면서 공방이다. 이 작고도 많은 공예품들이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두기는 할 터이다. 그러나 저 하늘에 눈을 두고 걷는 사람은, 골목이 내어주는 케케묵은 지난날의 이야기에 몸을 싣고 걷는 사람은 애써 가다듬은 마음을 여기에 내려놓을 수 있을까.





바람의 언덕으로 가보라고, 마음을 다 씻어줄 만한 전망을 준비해 두었다며 자꾸 걸음을 돌리란다.





무언가 아쉬움이 남았는지 지나온 골목을 뒤돌아보다가 파란 옷을 입고 있는 작은 집에 빠져들고 말았다.


어떤가. 정감이 가지 않는가. 이 집이라면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1년쯤 머물면서 골목이 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회억回憶하는 소설이나 한 편 써보는 시간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멘트를 발라 놓기는 했지만 햇볕이 잘 드는 저 토방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이야기를 불러올 수 있을 것 같다.


작은 집이 좋다. 무언가 모자라고, 그래서 채워 넣어야 할 것이 있는. 산자락에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좁은 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런 작은 집.


아내는 지나친 센티멘털리즘이라고 말한다. 감상感想이 지나쳐 감상感傷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정말 나는 감상주의자感傷主義者일까. 그냥 햇볕이 좋고, 바람이 좋고, 조금은 슬프고, 약간의 동정심이 일어나는 느낌이 좋은 나는 센티멘털리즘에 빠진 걸까.


INFJ는 회피형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와 부딪히려 하지 않고, 남이 끼어들어오는 것을 감당하기 싫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지 않으려는, 그래서 안으로만 파고드는.


산길을 걸어도, 좁은 골목을 걸어도 텅 비어 있을 때, 걸음에 힘이 실린다.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감성感性이 살아난다. 그리고 무한 상상의 날개가 돋는다. 하늘로 날아갈 듯한 그 힘찬 날갯짓을 어느 순간 나 혼자 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만의 세계를 즐긴다. 좋다. 평안하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골목은, 작고 아름답고, 텅 빈 골목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어서 살을 붙일 이야기가 가득하지 않은가. 한참을 서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파란 벽에 내려앉는 햇살을 담은 그 작은 집이 몰아온 회오리에 참척되었기 때문이다.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져 객창감을 돋우고, 개염나게 하는 까닭이다.


카페 '나포리'를 이곳에 열어 놓은 사람은 누구일까. '지천명知天命의 여인일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럴 거라고 확신의 매듭을 지었다. 이미 펼쳐져 버린 상상의 날개 끝에서 돋아나는 허구인 듯 허구 아닌 허구. 나슨하다. 그래서 든든하다.


카페 '나포리'의 마담(옛날 다방의 여주인이 아니라, 기혼·미혼에 관계없이 상당한 지위에 있는 여성에 대한 경칭을 이르는 프랑스어)을 그려본다. 가슴 터지도록 사랑했던 남자를 잊지 못하고 머리를 깎았던. 불경을 낭송하는 마음조차 산산조각을 내버리고 법당을 가득 메워버리는 그 애련한 남자를 지우지 못하고 빡빡 깎은 머리 그대로 환속해 버린, 그런 아픈 가슴을 가진 얼굴이 하얀 여자. 이제는 햇살을 끌어들여 쿵쾅거리는 사랑을 다독여 덮어 놓은 여자. 멋을 아는 여자.





이 창문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이 좁은 골목을 향하고 있는 이 창문은 누가 언제 왜 열어야 할까. 생각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황혼 무렵에 여는 것을 어떨까. 장에 간 할멈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지난날의 잘못을 죄다 꺼내놓은 죄스러움과 함께.


아직 채 여물지 않는 눈동자로 지나가는 대학생 오빠를 훔쳐보는 어린 여학생의 마음은 어떨까. 왠지 좀 슬픈 감성이 흐르는 장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창문이 갖고 있는 애처로움 때문일까.


세상을 흔들어 버렸던 MBC 주말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 후처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된 친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던 막내아들 송승헌이 생각나기도 했다. 돈 많은 여자를 만나겠다는 야심으로 순정 어린 미숙을 차버리는 뺀질이 차인표는 이 문을 열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열 수도 없을 것이다.


카페 '나포리'의 마담이 해 질 무렵, 흘러가버린 세월을 반추하며 아무도 모르게 빼꼼히 열어 가슴 아픈 사랑을 되새겨보는 것은 아닐까.


골목에서, 낡은 창문 앞에서 여행은 참 재미가 난다.





이런 곳이라면 벤치에 하루 종일이라도 앉아 있고 싶었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택배로 왔다>도 좋고,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더 좋을 것 같다.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다 필요 없고 이런 시 한 편만 있어도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가 있을까.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등을 보일 수 있다는 말일까. 낯선 여행지니까 가능한 떠올림이다. 그래서 여행은 배가 아니라, 마음이 부르다.



비라도 한 줄기 내리는 날에는 펑펑 울어버릴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았다. 목울대를 내려놓고 발버둥거리며 울어도 좋으리라. 이런 곳이라면.




여기에 무엇을 더한다는 말인가.


아주아주 먼 옛날 이 모퉁이에서 배를 타고 나간 남정네를 그리워했을 아낙의 수더분한 마음이 그대로 묻어 나올 법하지 않은가. 머리를 두 갈래로 정갈하게 땋은 여학생의 하얀 옷깃에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며 바라보던 까까머리 남학생이 생각나지 않는가.


골목은 모두 그리움의 공간이고, 잊혀버린 시간들이다. 더구나 이렇게 바다라도 보일라치면 골목은 더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담기는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골목에서 나는 문득 시인이요, 소설가가 된다.




이 길을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걸을 수가 있을까.


짧은 몇 걸음을 걸으면서 이 길을 걸어갔을 사람을 생각해 내려고 온몸을 비틀어 쥐어짰다. 그리고 엿판을 메고 훌훌 털고 걸어가는 '성기'를 생각해 내었다. 혈연 관계인 '계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접어 떠나보내는 '성기'의 마음을 꼭꼭 씹어 보았다. 만약에 내가 '성기'역을 맡은 배우였다면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떠나가는 계연을 어떤 얼굴로 바라볼 것이며, 계연이 걸어간 구례 방향이 아니라, 하동으로 길을 잡아 엿판을 메고 떠나는 '성기'의 마음을 드러낼 자신이 없는 까닭이다.


길은 언제나 사랑으로 보인다. 이을 수도, 끊을 수도 없는 사랑. 김동리는 그래서 화개 삼거리를 배경으로 성기와 계연을 불러냈을까.


늙어서 이게 무슨 짓인가 하다가 '여행이니까, 그리고 여기는 동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논골담길이니까'하고 슬쩍 웃음 지어 보았다.



'길은 무한하다. 할인割引도 없으며, 덤도 없다. 그런데 누구나 자기의 어린애다운 척도尺度를 가지고 재어보고 있는 것이다. 「좋군요. 당신도 이만한 길을 걸어야 해요. 잊으면 안 돼요」'


F 카프카의 <죄, 고통, 희망, 진실의 길에 대한 고찰>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길은 자신의 기준으로 걸어야 한다. 깊은 철학적 사유思惟이도 좋고, 가슴 저린 아픔이어도 좋다. 이제는 흘러가버린 시간충분히 하나의 길리라.



논골담길은 저 혼자 서 있다. 고샅을 채우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세월에 묻어 흘러가 버렸다. 남은 것이 없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가고, 햇살이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저마다의 걸음을 걷는다.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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