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파도는 다가오며 속삭이건만
텅 빈 마음으로
바다, 밤에 젖은 바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바람이 없는 날에도 물결은 밤을 가르고 있다. 살아있다는 외침이다. 김남조 시인이 말하는 ‘겨울 바다’는 아니더라도 바다는 가라앉는 마음을 일으켜 준다. 힘이다. 깨우침이다. 기도를 해야 하는가. 아침이 올 때까지 밀려들어 올 바다 앞에서.
훌쩍 떠나 온 걸음은 가벼웠다. 그냥, 차박이 마려웠다. 갈증이었을까. 도시는 밀고 또 밀어냈다. 동력이 다 문드러졌다는 걸 감지하면, 발끝부터 떨려왔다. 가슴께를 흔드는 속울음이 이르기 전에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은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자동차를 깨워 저녁이 내리는 도회지의 시끄러움을 떨쳐내었다.
달렸다. 무작정 동해를 향하여 악셀에 힘을 주었다. 어둠이 두꺼워지는 영동고속도로는 침묵만을 내놓았고, 나는 심드렁하게 핸들을 잡고 있었다. 무엇인가 화두를 올려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도로 위에서 밤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렇게 바다로 갔다.
맹방해변에서 차를 멈췄다. 덕봉산이 바다와 어둠과 그리고 밤과 더불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고, 바닷가는 휘휘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휘휘함을 느끼다니! 들끓고 있는 도회지에서, 그 시뜻하게 흘러 다니는 시간에 싸여 흠착거리던 사각의 틀에서 도망치듯 달려 나왔는데 휘휘하다니! 낯섦의 느낌이 이렇게 다가올 줄이야.
황혼 무렵을 살아가고 있는 즈음에는 도회지의 시간들은 낭창낭창하게 흘러가야 하지 않을까. 모가 나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이어지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삶은, 생활의 그래프는 가끔씩 뾰족하게 각을 보이기도 했다. 모가 난 삶의 그래프는 서로 얽혀 돌아가면서 둥글둥글해지기도 하련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을 콕콕 찔러 오기도 했다. 그리고 아프기도 했다. 이래저래 노년의 삶은 무거운가 보다.
바다는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 짭조름함에 젖어 텅 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파도는 연거푸 하이얀 포말의 띠를 가져다 놓았으나 걷어 올리기도 전에 모래밭이 하나도 남김없이 가로채버렸다. 트렁크에 걸터앉아 밤을, 밤의 바다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가슴께를 차지해 버린 삶의 무거움을 조금씩 덜어내려 했다. 늙은이의 가슴이라 조금의 무게를 가진 것들도 육중하게 짓눌러 왔다.
트렁크에서 내려와 모래사장을 걸었다. 전화기도 차에 둔 채로 걸었다. 알몸으로 걷고 싶었다. 내가 지나가고 있는 삶의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까닭이다. 밀려온 바닷물이 발목을 적시는 순간, 바다는 하나의 커다란 스펀지가 되었다. 몸부림하며 길길이 날뛰던 바람을 다 끌어안아 버린 바다. 끝없이 더러운 흙탕물을 쏟아내던 강물을 다 들이마셨던 바다. 그러고도 어디서 인지 정갈한 이야기들을 한 아름 가져다 놓는 바다. 바다는 참 푹신한 침대였다.
밤을 타고 끈덕지게 밀려오는 하얀 포말 앞에서 마음을 씻어내고 싶었다. 온갖 사람들의 투덜거림과 세상이 내다 버린 욕지거리들을 남김없이 받아내었던 바다가 다독이고 다독여서 내놓은 물결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때, 전봉건 시인의 『피아노』가 생각났다.
피아노에 앉은 / 여자의 두 손에서는 / 끊임없이 / 열 마리씩 / 스무 마리씩 / 신선한 물고기가 /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 쏟아진다. //
나는 바다로 가서 / 가장 신나게 시퍼런 / 파도의 칼날 하나를 / 집어 들었다.
그 ‘시퍼런 파도의 칼날’은 지금, 내 앞에 있다. 바다가 주는 활력, 세 시간이 넘게 밤을 달려온 까닭이다. 헐떡이는 숨을 가누기도 전에 나는 그 ‘시퍼런 파도의 칼날’을 집어 들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바다, 원초적 본능으로 파고드는 바다 앞에서 내가 주워들은 것은 무너지지 않을 의지였다.
트렁크를 열어 놓고 차 안에 누웠다. 어둠은 파도 소리에 희석되어 버렸는지 묽게 흩어졌다. 청옥산 산자락이 내놓던 태초의 어둠이 아니었다. 짜릿하지 않은 어둠을 대신한 것은 칸타빌레cantabile로 밀려오는 ‘시퍼런 파도의 칼날’이었다. 늙어가는 만큼 무디어져 가는 감성과 뾰족함을 잃어가는 지성을 벼려야 할 ‘시퍼런 파도의 칼날’을 들어 가슴 안쪽으로 쌓여가는 응어리들을 뭉텅뭉텅 베어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친구는 그깟 응어리쯤은 이제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라고. 이제는 좀 흐릿해진 마음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잃어버린 것들, 놓쳐버린 것들이 참 많다. 젊었을 때는 잃어버리는 줄도 몰랐고,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도 못 하고 살았다. 앞장서서 달리고 있는 물욕과 그 이상으로 힘을 쏟아내고 있는 명예욕에 짓눌려 제대로 된 눈을 뜨지 못했었다.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황혼이 붉게 물들어 오는 생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지금이다.
파도는 밤을 새워 밀려올 모양이다. 어깨에 매달려 있는 아기 귀신같은 삶의 무게들. 털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 마음으로도 ‘소풍 끝내는 날’에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칸타빌레cantabile로 멈추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는 ‘시퍼런 파도의 칼날’은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몽땅 빗자루만큼이나 남은 날, 너무 재지도 말고, 수첩에 적어가며 치열하게 살지 말고, 되는 대로, 마음 끌리는 대로 살라고 하는 것일까. 젊은 사람들이 좀 찌푸리는 얼굴로 바라보더라도 그게 내가 사는 방법이라고. 그러니까 이제는 등한시하고 살라는 것일까. 이제 좀 묶인 사슬을 스스로 풀어버리라고. 몸에 안 좋아도 저녁노을 바라보며 막걸리도 한 잔 마시고, 달달한 양촌리 커피도 홀짝거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대만 타이중의 시골 카페에서 보았던 황혼을 생각했다. 그 작은 카페에 붉은빛 황혼을 가득 채워 놓았던 노인. 방문객들을 위한 노트를 내놓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담고 있던 노인. 기울어가는 황혼 녘에 등신불等身佛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직한 피아노의 선율을 쌓아 올리던 노인과 그의 노쇠해 가는 시간. 그리고 가득한 붉은 황혼.
새벽이 오는 바다에서 파도는 다가오며 속삭이고, 밤은 이미 익을 대로 익어가고 있다. 잠을 잃어버린 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혼자서. 텅 빈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