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박으로 가는
폭우가 내린다. 세상의 문을 닫을 듯이 세찬 비가 퍼붓는다. 지금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빗줄기뿐이다.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로 다져진 땅은 이미 흙탕물이 넘실거리는 강물이 되어 거센 물줄기가 휩쓸고 있다. 두꺼운 그늘을 펼쳐 놓던 나무는 이파리를 뚝뚝 떨구며 맥을 놓고 망연자실할 뿐이다. 비는 하늘마저 무너뜨리고 의기양양하게 세상을 휘젓고 있다. 비는 세상을 거머쥐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비의 세상이 되었다.
나는 고갯마루에 세워 놓은 차 안에서 비의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이글(내 차에 붙여준 이름)’과 더불어. 이럴 때마다 즐겁다. 평안하다. 느긋하고 행복하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밀려 들어오는 바람의 끝을 즐긴다. 상쾌하다. 창문에 부착해 놓은 선바이저는 세상을 뒤흔드는 폭우의 횡포를 거뜬하게 막아내고 있다. 뒷좌석의 시트를 접어 만들어낸 공간에 누워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끌어안는다. 세상을 잿빛으로 덮어버린 빗줄기 속에서도 상념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비의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차는, 정확하게 말해 ‘이글’은 나의 세상이다. 폭우도 어쩌지 못하는 오롯한 유토피아이다.
노트북을 열어 자판을 두드리다가 그만둔다. 빗줄기가 가려버렸지만, 지금쯤 황혼은 아름다울 것이다. 마음에 담아 두었던 그날의 붉은빛 황혼. 애절한 눈빛으로 스러지던 그리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흩어지던 가냘픈 그리움. 그 너머로 슬몃슬몃 보이던 사람. 황혼은 세상을 붉은빛으로 감싸 안고 마음으로 밀고 들어왔었다. 아름답게, 그리고 애절하게. 사랑은 그렇게 떠나갔었다.
쿵쾅쿵쾅 세상을 짓밟는 폭우를 담담하게 마주하는 ‘이글’이 좋다. ‘이글’ 안에서라면 아무것도 부럽지 않다. 나의 상념을 흔들어대는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이글’은 그래서 나의 자유로운 세상이다. 생각해 보라. 모두가 비에 젖고 있을 때, 나만 홀로 나만의 공간에서 바깥세상을 향해 큰소리를 지를 수 있고, 네 활개를 필 수 있지 않은가. 마루에 앉아서 빗줄기를 즐기는 것과는 견줄 수 없는 시간이다.
책을 읽어도, 한 편의 영화를 보아도 좋다. 자신을 짓밟은 네플로도프 백작을 부활의 종소리를 가슴으로 들으며 용서한 카츄사. 그리고 뚜벅뚜벅 눈 쌓인 시베리아 벌판을 걸어 나가는 카츄사의 복잡한 심사를 들여다보는 것도 좋으리라. 좁은 차 안에서 자신이 다자인하고, 가다듬는 세상은 분명,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시간이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나만의 세상을 차車 안에 펼쳐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차車의 매력이다.
함양에서 백무동으로 넘어가는 오도재에서 차를 세우고 밤을 보낸 적이 있다. 옆자리에 차를 세운 세 팀의 부부. 그들은 각자의 차를 집 삼아서 천하를 주유하고 다니는 분들이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은하수를 올려다보다가 둥그렇게 앉아 각자의 세상을 내놓게 되었다. 차박을 하며 돌아다니다 만나 팀을 이루어 돌아다닌 지 3년이 되었다는 그분들은 끈끈한 친분 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밥을 지어 나누고 술잔을 부딪치며 인생의 끄트머리에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있었다. ‘차는 우리 삶의 전부예요.’ 승합차를 타고 다니는 키가 작은 분은 주저할 것도 없이 엄지를 들어 올렸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차에 이불 하나 싣고 다니면 되는 거죠. 비상용으로 휴대용 가스레인지 하나와 냄비 하나 가지고 다니면서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하면서 세상을 유람하는 겁니다.’ 우울증을 앓던 부인 때문에 차박車泊을 시작했다는 그는 열혈예찬론자가 되어 있었다. ‘두 달 만에 우울증이 싹 나아버렸어요. 의사보다 훨씬 나은 게 차박이고, 여행이에요.’ 활짝 웃던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차는 어쩌면 우리 삶의 피난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차 안에 책을 몇 권 넣고, 가벼운 이불 하나 넣고 다니면 끝이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차를 세우고 밤을 맞으면, 그것이 침실이고, 아름다운 시간이 된다. 행복은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관령 주차장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차를 세웠다. 겨울용 거위털 침낭 속에 들어가 있으니 뽀송뽀송하고 좋다. 헤드랜턴을 켜고 박웅현의 ‘여덟 단어’를 읽었다. 살아가면서 꼭 생각해봐야 하는 여덟 가지 키워드를 말하고 있는 책이다. 그가 처음으로 내놓은 단어는 ‘자존自尊’이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아모로 파티Amor fati. ‘죽음을 기억하라’와 ‘운명을 사랑하라’는 죽음과 삶이라는 상반된 의미의 조합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니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것이고,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한 나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어느 위치에 있든, 어느 운명이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자존이라는 말이다. 차車 이야기를 하다가 웬 자존이냐고 하겠지만, 결국 우리의 삶에서 자존이 무너지면 존재의 의미마저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자존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스스로 부여하게 되는 것이고 보면, 지금 내가 차를 세운 이곳에서 나의 존재에 의미를 더하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차박은 그렇게 나의 자존을 높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전주에 살 때 집에서 가까운 ‘오리알터’라는 저수지에 자주 갔다. 한쪽 구석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문을 열어놓고 앉아 있는 것을 즐겨했다.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듯한 시간 속에서 혼자 누워 있으면 자연스럽게 시선은 안으로 향하게 된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 그리고 여러 가지도 모자라고 흠집이 있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는 일, 그것이 자존감이라고 생각했다. 집 안에서 골똘히 생각에 빠졌을 때보다는 차 안에서 비스듬히 누워 자연의 일부가 되었을 때는 존재감을 넘어 자존감이 더 살아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폭우가 퍼붓는 차 안에서 또 하나의 세상을 만난다. 시야를 모두 차단해 버린 잿빛의 하늘이 내놓는 이야기에 젖어 하룻밤을 보내야겠다. 지금처럼 이렇게 비가 내린다면 밤은 완벽한 태고적의 본질적인 어둠을 보여 줄지니, 그 제대로 된 어둠을 즐겨보아야겠다. 차박이 가져오는 또 하나의 세상을 오롯이 누려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