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미터 개인의 간격 / 홍대선 / 필사
현대인은 세상을 저주한다. 남성, 여성, 기성세대, 꼰대, 요즘 어린것들, 미 제국주의, 백인 우월주의 사회,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은 정치권에 분노한다. 하지만 적어도 OECD국가에 속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원금에 비해 이자가 몹시 적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가령 나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독립국에 살고, 민주화 투쟁을 하지 않았음에도 민주주의 사회에 산다. 당대의 노동자들을 처참한 나락에 떨어뜨린 영국 산업혁명의 도움도 받고 산다. 우리는 지난 세대와 역사의 결과물 위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환경이자 조건이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이자는 의무가 아닌 현상이다. 그리고 있어야만 하는 현상은 없다. 마음을 바꿔 싫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정신수행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에서 싫은 요소, 싫은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타인과 우호적으로 접촉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다. 세상과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이 나인 사람은 쉽게 증오에 빠진다. 나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다 보면 잘못된 세상과 바글거리는 머저리들을 저주하는 습관에 빠진다.
가장 중증의 단계는 자신의 분노를 정치, 더 나아가 정의로 착각하는 증상이다. SNS는 매일 분노에 가득차서 손을 벌벌 떠는 다양한 장르의 진보주의자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저주가 질병이 아니라 운동이라 착각하며 산다. 남들보다 먼저 깨우친 자가 되어 하나같이 자신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회가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민족주의적 진보주의자들은 해방후 운좋게 득세한 친일파들을 향해 뿌리부터 잘못된 대한민국에 개탄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를 시작하고 완성한다. 그들은 수탉처럼 빨갛게 화병의 벼슬을 세우고 들소처럼 씩씩거린다.
나는 진보주의자다. 하지만 누가 어느 진영에 있느냐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대신 누군가 자신의 진영을 옹호하고 반대편을 비판하는 방식을 바라보며 그를 판단한다. 내 편이 아니라 지성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는 편이 삶을 살아가기에 한결 좋다. 나와 같은 정치적 진영에 있는 목소리가 유난히 크고 말이 짜른 사람들은 보통 화가 많이 쌓여있다. 그는 사실 내 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편이며 자기애 때문에 자해하는 사람이다. 지식과 지성은 다르다. 지식과 무식은 단순의 앎의 양으로 나뉜다. 이에 반해 지성과 무지는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로 갈라진다. 태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지성인도 무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지에는 불행이라는 이자가 쌓인다. 이자는 복리며 어느새 원금을 넘어선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으면 반드시 살아가면서 상처 받는다. 나와 세상은 다르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세상은 내 욕망에 발을 맞춰주지 않는다. 자신이 세상의 파편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오히려 중심을 가지고 있다. 바로 자신만의 1미터 반경이다. 그는 자신의 반경을 차분히 살펴볼수 있기에 세상과 타인이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덜 불행하고, 불행을 잘 감내하며, 행복의 양을 늘릴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누군가가 이뤄 놓은 세상에 내던져 진다. 그렇다고 내가 한낱 부속품은 아니다. 나만이 바라보는 세상과 내가 만들어 가는 고유한 세상의 영역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내 세상에 어떤이를 들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내용이 달라진다. 누군가가 이뤄놓은 세상과 내가 만든 세상을 합한 것이 내 삶이다. 그리고 모든 삶은 자기만의 색을 지니기에 타인과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저자가 말하는 1미터 개인의 간격을 유지할 때 우리생은 훨씬 더 풍요롭고 아름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