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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Aug 08. 2023

헬프 미 시스터

플랫폼 노동과 가족의 재구성, 그리고 여성 연대

소설은 6인 가족과 그들 주변 인물들의 개별 사연과 음성을 모아 하나의 얘기로 완성해 가는 병렬구조다.

1인 가구가 4인 가구의 두 배로 전 인구의 30%를 넘어 고독사를 걱정하는 시대에 조금 넓은 원룸 정도의 공간에 6인이 모여 사는  가족은 고독하기도 힘들다.

30년 된 방 두 칸짜리 15평 빌라에 여섯 식구가 산다. 방 두 칸 중 하나는 중년이라기엔 젊고 청년이라기엔 늙은 수경 부부가 살고 나머지 한 칸은 십 대 조카 둘이 산다. 수경의 친정 부모는 남는 방이 없어 마루에서 지낸다. 미성년자 둘을 빼도 성인이 네 명인데 아무도 일을 안 한다. ‘이렇게 된 이유가 있고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일을 겪었다’라고 수경은 이해한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수경이 회사의 큰 계약을 성사시킨 날 회식이 잡힌다. 많은 술이 오갔고 수경은 어느 순간 정신을 잃는다. 평소 신뢰하고 친하게 지내던 남자 동료가 수경의 술잔에 졸피뎀을 탔고 정신 잃은 수경을 데려 나와 여관에 끌고 갔다. 둘의 상태를 수상히 여긴 여관 주인의 신고로 성폭행 직전에 구출된다. 범죄자는 벌금형 처벌로 끝나고 피해자인 수경은 회사를 그만둔 뒤 넉 달째 집에만 있다. 이제 수경은 많은 돈보다 ‘안전한 장소’ ‘위험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꾸준히 돈을 버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안전하고 위험하지 않은지 알기 힘들고 그것을 구별하려는 순간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남편 우재는 하도급 건설회사에서 퇴직한 후 주식 창만 들여다본 지 4년 째다. 사람들은 그가 주식 사기꾼에 속아 로또 같은 한 방을 바라며 회사를 그만둔 거로 알지만 사실은 회사의 비자금 조성과 룸살롱 접대가 싫어서다. 결정적인 퇴사 사유는 산업재해 당한 상사 때문이다. 그는 비 오는 날 공사 현장에서 감전사고 위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기계를 돌리다 한쪽 팔을 잃었다.

‘회사란 어떤 곳일까. 직원의 한쪽 팔과 수천만 원의 비용이 저울질당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런 곳이라면, 기꺼이 떠나야 하지 않을까?’

그때는 수경도 우재의 퇴사를 지지해 주었다.

돈이 없으니 친구들은 네 캔에 만 원 하는 맥주를 파는 편의점에서 가끔씩만 만난다. 친구들은 묻는다. “너는 도대체 무슨 돈으로 먹고사냐?”     


친정엄마 여숙은 병원에서 미화원으로 오래 일했다. 병원이 아닌 용역회사에 고용된 여숙은 최저임금 인상 후 근무 시간은 축소되고 업무 강도는 높아져 오히려 임금은 줄고 몸만 축났다. 딸 수경의 사고 후 병원 일을 그만두고 그녀를 지킨다.

아버지 양천식은 사기를 당해 집까지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수경의 집으로 들어온 지 2년째로 사기꾼 추적에만 골몰한다.

 이제 사기꾼 추적은 그만하고 가족을 위한 생활비를 추적해야 한다. 잠을 안 자며 생계를 걱정해 보지만 사기꾼의 행방을 찾을 수 없는 거처럼 생활비의 행방도 묘연하다.


사고 전에는 여성 가장인 자신의 역할을 담담히 받아들였지만, ‘성범죄를 당한 여성 가장’이라는 이 상황은 힘들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놈을 칼로 찔러 죽이는 상상도 하지만 트라우마 극복보다 생존의 해결이 시급하다. ‘그놈을 죽이면 누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지?’

놀면서 트라우마보다 ‘돈이 가장 무섭다’라는 걸 깨닫는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1년 안에 가족은 침몰할 것이다. 큰일을 겪고도 ‘어떤 분노는 가난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드러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억지로 수습되어 버린다.’

조카 준후가 가해자를 찾아가 때려 합의금을 무느라 적금까지 깼는데 이 집에선 누구도 일하러 가려는 사람이 없다. “나는 괜찮으니 모두 일하러 나가자.”

     



온 가족이 플랫폼 노동으로

     

외상후스트레스로 대인기피증이 생긴 수경은 비대면 직업을 찾다가 택배 배송 일을 하게 된다. 처음엔 딸을 걱정한 엄마가 수경의 일을 도우러 나오고 남편은 대리운전과 택배 일 쓰리잡을 하고, 아버지는 음식 배달 일에 뛰어들면서 온 가족이 플랫폼 노동에 뛰어든다.

수경의 시조카 준후는 이 가족을 이렇게 묘사한다.

‘삼촌은 해외선물 거래를 하면서 밤엔 대리기사로 일하고, 숙모는 자기 차로 배송을 하고, 할아버지는 도보로 음식을 배달하고, 할머니는 용역회사에 다시 나갔다가 실장과 다툰 뒤 집에서 쇼핑백을 접고 있다.’     

사진출처-알라딘


소설은 IMF 이후 대부분의 근로 형태로 정착된 계약직, 파견직이 이제 플랫폼 노동으로 진화, 혹은 추락하는 과정을 면밀히 보여준다. 거기엔 사람, 대면, 음성 대신 키오스크, 휴대폰, 알람, 클릭이 있다. 배송, 대리운전, 심부름센터, 미성년자 몸캠 쳇방, SNS 등의 다양한 전자 플랫폼을 글의 주요 소재로 삼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택배 배송에 관한 묘사가 소설 전체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직업적 묘사도 치밀하다.     


플랫폼 노동자의 서류상 계약 형태는 ‘사업자를 낸 사장님’이다. 온라인 업무가 기반이 되는 전자 네트워크의 형태도 있고 현장, 영업 업무가 중심이 되는 오프라인 근무의 형태도 있다.

배민/요기요 등의 음식 배달 기사, 우버 기사, 대리운전, 쿠팡 플랙스 등이 전자이고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보험 설계사 등이 후자다. 이 둘을 포괄적으로 ‘특수고용노동자’로 부른다.

언급한 직업은 노동 주체와 그 가족 외에 상기 직업들이 ‘1인 자영업자’ 형태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 자신을 비롯해 주변 가까운 사람 중 이런 직업 종사자는 잘 없거나 사회 현상에 관심이 많아 뉴스를 챙겨 봐도 입시제도, 아파트값처럼 내게 직면한 문제가 아니니 노동 뉴스를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배달, 택배, 우버 기사가 ‘사장님’이란 걸 알기 쉽지 않다. 이들은 원래는 어떤 회사 소속의 ‘급여자’였다가 어느 날 반 타의로 ‘사장님’이 되었다.


‘사업자를 낸 사장님’이란 무엇인가? 내가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 사업의 품목과 물량, 마진, 영업 근무 시간, 점포 소재지 등을 스스로 결정해서 운영,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플랫폼의 사장들은 그런 자율권이 없다. 앱으로 호출이 오면 고객을 태우러, 물건을 나르러 눈썹이 휘날리게 가야 한다. 시간을 늦추거나 거부할 수도 있지만 배송/배달량 축소, 평점 삭감으로 결국 수입이 줄게 하고 반복되면 계약 해지된다. 문자 해고대신 앱 탈퇴다.


푸시 알림을 볼 때마다 늘 대기 상태로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시달렸다. 끄면 되는데 그게 도무지 쉽지가 않았다. 딱히 할 일이 없으면 슬슬 운전해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런 식으로 자신을 설득하다 보면 핸드폰을 놓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식으로 휴일과 노동일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주말에 쉬는 것조차 죄책감이 든다, 주말엔 배송 단가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벌 수 있는데 벌지 않으면 벌을 받는 기분에 시달리게 된다는 걸 누가 이해해 줄까.     


사장이지만 내가 취급하는 물품, 대금의 소유권이 없어 판매액의 수익이 소득이 잡히는 게 아니라 건당 수수료가 수입이다. 850 원. 하루 100개 배달해야 85,000 원 벌 수 있는 금액이다. 기름도 넣어야 한다.


모 물류업체의 배송 택배 단가


자차 배송 기사의 월급 시급은 본인이 직접 결정한다. 뛰면 시급이 오르고, 화장실에 자주 들르면 내려간다. 밥을 굶으면 오르고, 밥을 먹으면 내려간다.
비둘기도 물 먹을 시간이 있는데 우리는 어째 그런 시간도 없냐?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현재지향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최저 시급 비정규직, 최저 임금 수준의 사장을 오가며 살아온 나는 시장 보러 가거나 어떤 물건을 살 때 ‘최저임금’과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최근엔 수박 한 통이 38,000원까지 오른 걸 보고 ‘4시간 일해도 수박 한 통 먹기 힘든 세상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 우재도 그렇게 된다.


“종일 주식 거래만 했을 땐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모양새도 다 차트로 보였거든. 근데 이젠 이런 생각만 들어. 저 차는 물건을 몇 개나 실을 수 있을까?”


자차 위탁 배송 계약 문구엔 ‘독립계약직, 자영업자’로 돼 있지만 ‘비용’ ‘지출’에 한해서만 독립적이다. 장갑, 운행 기름, 바이크나 트럭 구입비와 유지 보수비 등 업무상 지출과 국세청 세금, 근무 중 재해시 치료비나 사고 처리비 등 비용에 관해서만 철저히 독립적이다.

기업이 사장의 소득, 노동 시간과 형태 등 전 분야에 거의 전권을 행사하면서 4대 보험, 퇴직금 등의 비용과 사고 시 분란을 개인에게 다 떠맡기는 구조다.


산재 처리도 안 되고, 작업 비용도 자기가 다 지불해야 하고, 그게 뭐냐? 현대판 노예라니까. 산업혁명 시대로 돌아간 거나 다름없어. 근로자를 사업자라 칭하고, 고용자를 중개자라고 칭하는 거야. 자기들은 그게 중개만 하니까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거지. 노동자를 직고용하지 않고 파견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이젠 앱이나 웹 같은 풀랫폼으로 일을 시켜. 그게 사이버 프롤레타리아라고 해요.“


일을 시키고 취득하는 사람은 있는데 고용하는 사람은 없는 기이하고 교묘한 구조다. 노동 강도와 산재 위험도가 높고 수입이 불안정한 직종을 위주로 노동 형태가 변하는 과정을 소설 속에선 이렇게 묘사된다. 


이제 이 세상은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을 거쳐 플랫폼직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거예요. 리어카 대신 앱으로, 폐지 대신 일거리를 주울 것이다. 폐지 줍는 노인이 아니라 플랫폼 노동하는 노인으로 불릴 것이다.
 

누가 이런 플랫폼 노동에 종사할까? 실업자, 폐업자, 혹은 실업과 취업, 폐업과 창업 그 공백기의 사람들이 많이 한다. 코로나 시기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들과 택시 기사들이 물류센터로 대거 이동했다는 뉴스가 기억난다. 쉽게 말해 이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지 못하거나 실패한 사람들, 경력단절된 사람들이 별 경력제한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플랫폼 노동이다.      

앞으로는 특수 연구직 소수를 제외하면 정규직 사원의 비율은 점점 감소할 것인데, 알바와 계약직, 실업을 전전하던 청년세대는 경력단절도 아닌, 경력을 만들기 전에 나이 들어 이런 노동형태로 가는 것이다. 


자차 배송 구인 광고

소설 속 수경네 가족들 전부가 플랫폼 노동에 뛰어드는 것도 성범죄 트라우마로 퇴직한 39살의 수경, ‘경력직으로 가기엔 경력이 모자라고  신입으로 가기엔 나이가 많은’ 마흔의 남편, 요양원 청소원으로 일하다 그만둔 엄마, 사기로 집을 날린 아버지처럼 재취업하기 힘든 조건의 사람들이 차, 면허증과 폰, 눈과 팔다리만 있으면 별 경력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창업과 폐업을 번갈아 하던 퇴출당한 중년 자영업자와 진입 거부당한 청년이 배송 물건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 왔다. 한국이 자영업자 비율이 유독 높다는 뉴스가 자주 나오지만 그 내막은 치킨집, 커피집이 날마다 늘어서기 보다는 이런 플랫폼 노동자가 자영업자로 포장돼 통계에 잡히는 고용 형태의 변화가 은폐돼 있다.

소설 속에서는 ‘온라인상에서 정보나 재화의 생산자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주어지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만 가능한 사이버 빈민 계층.’인 ‘사이버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이 나오는데 플랫폼 노동이라는 용어보다 확 와닿았다. 드론과 무인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는 4차 혁명 시대엔 배송 일도 기계들에게 뺏길 거라는 전망과 걱정을 하는 수경에게 우재는 이렇게 말한다.


배달 드론이나 무인배송 트럭.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드론이나 무인 배송 트럭이 인명 사고를 일으켰다고 가정해 봐. 그러면 회사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잖아. 그런데 우리 같은 긱 노동자를 고용해서 독립 계약자의 지위를 주고 일을 시키면 비용이 훨씬 적게 들어. 우리한테 사고를 다 떠넘기면 되니까.     


검색창에  자차 배송을 치면 나오는 이미지


집중 탐사보도물, 르포물을 가족형 생활 드라마로 변환해 놓은 거 같은 소설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묘사와 약간은 비현실적인 상황을 담고 있다. 뛰어난 현실의 재현성은 작가가 몸소 소설 속 직업과 상황을 겪었을 거라는 추측과 신뢰를 주는 사실적 묘사고 비현실적 부분은 돈 버는 사람 하나 없는 여섯 식구가 좁은 집에서 비교적 사이좋게 지내는 상황이다. 이런 집에 객식구까지 번갈아 놀러 온다.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그런 부분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다 읽고 덮었을 땐 작가가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이 세계에서 가족만은 ‘불행한 미래를 함께 방어하는 존재’로 남겨놓고 싶은 마음으로 이해됐다. 또 그 가족은 혈연, 법적 가족, 사랑으로 한정된 의미를 확장해서 ‘우정’이나 ‘연대’로 확대하고 싶어서 다양한 세대를 좁은 한집에 굳이 모여 살게 한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집, 성인 가족이 아무도 일하지 않는 다인 가족 구도는 영화 <기생충>도 연상시킨다. 그들만큼 가난하고 그들처럼 아무도 일 안 하는데 그들보다 더 대식구인데 그들만큼 사이가 좋다.


봉준호의 <기생충>에는 없고 이서수의 <헬프 미 시스터>에는 있는 것.

가족: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법적, 생물학적 관계.     


봉준호의 <기생충>을 본 사람이라면 가난한 다인 가족이 좁은 지하집에 모여 사는데 아무도 일을 안 하면서 그럭저럭 화목한 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기택네 집처럼 가난의 경험이 있거나 현재 가난한 가족이라면. 여기까지만 이서수의 <헬프 미 시스터>와 같다. 아니, 소설 중간중간 가족들이 툭툭 내뱉는 위트 있는 대사나 독백에서도 그 영화가 생각나긴 한다.  특히 아래 인용문인 아버지의 독백은  <기생충>의 기택이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를 외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친구들은 양천식이 대출도 없고 아픈데도 없고 사위와 사이도 좋다며 그 비결을 묻는다. 건강검진을 안 받아 어디가 아픈지를 모르고 대출도 자격이 안 돼서 못 받고 사위와 사이좋은 이유는 둘 다 실직. 무소득자이기 때문이라고 차마 말 못 한다.


봉준호는 자신이 본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을 포착해 표현하는 능력은 탁월했으나 그가 만들고 싶은, 바라는 세상은 없었다.  사건, 또는 해결 대부분은 ‘혈연적’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선망한 고용주 가족은 물론 기태네 가족, 지하 생활자까지 모두가 혈연, 법적 가족의 테두리 안에 묶여있다. 가족 중심주의는 얼핏 끈끈한 유대관계나 온정주의로 포장되기 쉽지만 가족 만능, 이기주의로 변질하기 쉽고 가족의 관계나 가정이 붕괴되면 재기하기 힘들다. 기태 가족, 지하 가족도 가족 외의 사회적 연결고리, 연대가 없어 결국 대저택의 마당, 지하에서 죽거나 갇히는 것으로 끝났지 않은가.


이서수가 그린 가족은 혈연이나 법적 호구로 묶여있지 않다. 

수경에게 가족은 끈끈한 ‘사랑’ 보다는 덤덤한 묵은 ‘우정’에 가깝다. 아무도 일하지 않는데 수경이 큰소리 한 번, 잔소리 하는 장면 하나 없는 건 가족을 사랑보다는 우정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상황이 안 좋아지면 등 떠밀고 채찍질하고 들볶기도 하지만 친구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봐 주고 응원해 줄 수 있으니까.

수경은 ‘원래부터 결혼이란 사랑하는 남녀의 결합이기보단 진심 어린 우정을 가진 두 사람의 결합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한 거 후회하느냐는 남편의 말에 "넌 친구한테 만난 거 후회하느냐"라 묻고 4년을 반백수로 지내면서 그야말로 눈치 없이 이젠 내 눈치 없음이 귀엽지 않냐?라는 물음에 “아직까지 귀여우면 그건 범죄야.”라고 말한다.

또, 가장의 역할을 남편과 아버지라는 기존의 남성 경제 가부장 개념에서 벗어나 있다. 지금 일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이고, 가족 중 누군가가 어떤 이유로 그 일을 정말 하기 싫다면 다른 걸 찾게 지지해 주고, 실패한 사람은 다시 일어날 기운이나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는 건 어떨까로 읽혔다.     


요즘 소설에서는 드물게 등장인물이 아주 많다. 직급, 직업명사 외에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만 주인공을 포함해 12명이다. 이들은 각각의 한 가지 주제나 주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얘기를 맡고 있고 그 외에 한두 장면에 잠깐 등장하는 사람들도 저마다 웃기거나 짠한 방식으로 의미 있는 얘기를 한다. 한 소설 안에 많은 등장인물이 나와서 노동, 성범죄, 퀴어, 결혼제도 등 많은 얘기를 하는데 어지럽거나 헐겁지 않고 단단하다. 다양한 연령과 성별을 등장시켜 세대 화합의 희망을 담고 단선적 성별 구별에 의문을 제기한다

리얼하게 묘사된 플랫폼 노동 외에 돋보이는 장면은 여성 연대와 가족의 재정의다. 특히 수경과 나이, 삶의 환경이 다 다른 보라, 은지를 수경 옆으로 자꾸 불러들이고 그들의 생활과 고민을 보여주는 것도 가족의 확장 아닐까. 핏줄 가족을 넘어선 연대.


이 소설에서 남자들은 착하지만 여자들보다 짠하고 무능력하고 귀 얇고 사기 잘 당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실직, 주식, 사기 피해로 현실을 헤쳐나가기만도 급급한 인물들이다. 반면 여자들은 생활력 강하고 남에게 잘 안 속고 자립적인 인물들이다. 남자 가족들은 자신과 가족의 고민 밖을 나오지 못하는데 여자들은 자기가 겪지 않은 일에도 깊은 고민과 고통을 공유한다. 특히 은지, 보라, 수경은 가족은 아니지만 ‘언니’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고민과 미래를 같이 공감하고 공유한다.

성범죄 피해의 불안은 마흔을 앞둔 수경이나 십 대 은지가 다르지 않고, 보라가 느끼는 성정체성의 혼돈, 결혼식 부모 대행 심부름으로 만난 퀴어 부부의 모습에서 수경이 생각하는 결혼과 가족의 정의는 가족의 새로운 의미, 확장성을 제시한다.     

혈연의 가족이 아닌, 타인인 ‘언니’와 ‘동생’으로 만나 타인의 고통이 나의, 우리의 고통과 두려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르는 우리가 손을 맞잡고 미래를 보고자 한다.     


사진출처-알라딘

소설에서 수경과 엄마가 마지막에 정착한 플랫폼 노동은 의뢰자도 수락자도 다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여성전용 심부름 앱 ‘헬프  미 시스터’다. 이 책의 제목을 가장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안전한 곳에서 살고 싶은 여성들의 소망을 수경과 보라, 은지 같은 언니, 동생의 연대로 만들어가고 싶은 작가의 바람 같다. 수경이 성범죄 피해의 트라우마를 딛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모두가 기다려 준 것처럼 상처를 묻는 게 아니라 상처를 드러내 지닌 채로 걸어가는 것, 그 옆에 가족 말고도 타인인 언니와 동생들이 있어주는 것.

책의 첫 장에서 생계는 트라우마보다 강하다고 했던  수경이 마지막 장에서 생계를 넘어서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시스터들 덕분일 것이다.


생계 때문에 덮고 지나가려고 했던 것들이 서서히 보였다. 그들은 모두 이어져 있다. 총체적 가해의 형태를 이해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수경은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떠올렸다. 모여서 같이 고민하고 고통에 동참한다고 대책이나 결론이 쉽게 나는 것은 아니고 고민만 나누다 그칠지 모르지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덮어놓거나 남자가 없는 곳의 일만 하거나 엄마가 계속 보호하며 따라다니거나 운이 없었다고 치부하거나 돈이 없어서 그런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기적이다


봉준호의 기택 가족들이 밥과 혈연을 넘지 못해 끝내 성 밖을 나오지 못했다면, 이서수의 수경 가족은 밥과 혈연을 넘어 집 밖으로 나왔다. 기택이 가족들을 데리고 나온 지하집에 수경 가족은 들어간다. 엄마, 아빠의 방을 만들어주기 위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 웃으며.

단지 현실의 리얼한 재현, 보고서만 보고 싶다면 굳이 애써 한 권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예술이 <9시 뉴스>, <추적 60분>, <PD 수첩>을 넘어서려면 뛰어난 시대성 반영이나 현실 구현과 함께 작가의 세계관이 투영되어야 할 것이다.

지하실을 다 뛰어나간 기택의 가족이 대저택의 욕망에 함몰된 것이 봉준호의 세계관이라면, 지하실에서 살더라도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이 이서수의 세계관일 것이다. 기택 가족 중 남자 식구만 살려놓고 여자 식구들은 죽여버리는 게 봉준호의 세계관이라면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 약하고 상처받은 여성들이 재기의 주축이 되어 선두에 서게 하는 것이 이서수의 작가관일 것이다. 봉준호가 계급과 '가족'을 넘어서지 못했다면 이서수는 그 둘을 넘기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봉준호가 넘지 못한 '선'을 이서수는 넘어본다.        


가장 좋았던


수경 부부가 택배 배달을 하던 중 열린 문 틈으로 가정 폭력을 하던 남성을 말리고 여성을 구한 일. 남의 집안일에 간섭 말라는 폭력남의 말에 우재는 ‘착한 사마리인법’과 ‘택배 업무 중 폭력 발견 시 택배 배송인은 신고할 의무가 있다’는 거짓말로 폭력 피해자를 구해낸다. 일차원적으로 보면 우재의 착한 천성과 성범죄로부터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그보다는 수경이 더 큰 피해를 당하지 않게 신고해 준 호텔주인을 떠올렸고, 누군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외면하지는 말자는 작가의 음성으로 들렸다.    

이 외에도 수경 부모가 키오스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장면, 퀴어 부부의 결혼식에 대행 가족으로 참여한 파티 장면도 감동적이었다. 아, 나도 처음 보는 키오스크 두렵다!

  

안타까운, 혹은 아쉬운


온 가족 플랫폼 노동 이야기’인 이 소설에선 미성년자인 준후와 은지한다. 은지는 폰으로 성인 남자들에게 신체와 노예인증을 하며 돈을 받고, 준후는 게이머들을 모아 그들이 거는 배팅액의 지분만큼 수수료를 받은 총책으로 일한다. 그 애들이 그렇게 된 사정은 있다.

그러나 어른들에게는 다시 일어나는 재기와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던 작가가 왜 미성년자 둘은 플랫폼 노동의 가장 부정적인 공간에 그대로 남겨두었을까. 가족이란 '불행한 미래를 함께 방어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작가가 왜 어린 이 둘의 불행엔 손잡아주지 않았을까. 자식들을 방기한 부모 때문에 일찍 어른이 된 준후는 플랫폼 노동에 대해 이런 통찰까지 한다.


이 일은 폰만 있으면 집, 학교, 무덤가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궁금한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은 모두 성 없이 이름으로만 등장한다. 주인공인 수경을 비롯해 여숙, 우재. 보라. 준후, 은지. 그런데 왜 아버지만 천식이 아닌 ‘양천식’일까.     


며칠 전 뉴스에서 “38킬로 에어컨도 단가 800원”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플랫폼 노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노동자를 위한 바람직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바람’을 소설에 담았다고 했다. 나 또한 그런 바람에 마음을 얹으며 소설 속 인용으로 긴 독후감을 마친다.


어떤 이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벌지 못해 일을 그만둔다면, 그것은 회사가 해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은 회사가 그들을 해고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저 더 많은 돈을 벌기 이해 다른 곳으로 더 나는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 리뷰에서 얘기한 플랫폼 노동에 관한 많은 얘기는 소설 <헬로 미 시스터>, 전혜원 기자의 <노동에 관해 말하지 않은 것들>을 주축으로 나의 경험과 그간 뉴스 등 매체에서 본 내용들을 섞어 편집한 것입니다. 인용이나 출처는 정확히 밝히려고 하는 편이지만, 경험과 독서, 뉴스의 내용들이 꼭 어느 한 곳, 누구의 얘기라고 정확히 기재하기엔 불분명하고 서로 간에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애매해서이다.

그 외 소설에 직접 등장하는 지문이나 대사는 인용 표시를 별도로 했습니다.


 같이 읽기 좋은 책

<노동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전혜원. 서해문집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박정훈. 빨간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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