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노동과 가족의 재구성, 그리고 여성 연대
이제 사기꾼 추적은 그만하고 가족을 위한 생활비를 추적해야 한다. 잠을 안 자며 생계를 걱정해 보지만 사기꾼의 행방을 찾을 수 없는 거처럼 생활비의 행방도 묘연하다.
푸시 알림을 볼 때마다 늘 대기 상태로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시달렸다. 끄면 되는데 그게 도무지 쉽지가 않았다. 딱히 할 일이 없으면 슬슬 운전해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런 식으로 자신을 설득하다 보면 핸드폰을 놓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식으로 휴일과 노동일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주말에 쉬는 것조차 죄책감이 든다, 주말엔 배송 단가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벌 수 있는데 벌지 않으면 벌을 받는 기분에 시달리게 된다는 걸 누가 이해해 줄까.
자차 배송 기사의 월급 시급은 본인이 직접 결정한다. 뛰면 시급이 오르고, 화장실에 자주 들르면 내려간다. 밥을 굶으면 오르고, 밥을 먹으면 내려간다.
비둘기도 물 먹을 시간이 있는데 우리는 어째 그런 시간도 없냐?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현재지향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종일 주식 거래만 했을 땐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모양새도 다 차트로 보였거든. 근데 이젠 이런 생각만 들어. 저 차는 물건을 몇 개나 실을 수 있을까?”
산재 처리도 안 되고, 작업 비용도 자기가 다 지불해야 하고, 그게 뭐냐? 현대판 노예라니까. 산업혁명 시대로 돌아간 거나 다름없어. 근로자를 사업자라 칭하고, 고용자를 중개자라고 칭하는 거야. 자기들은 그게 중개만 하니까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거지. 노동자를 직고용하지 않고 파견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이젠 앱이나 웹 같은 풀랫폼으로 일을 시켜. 그게 사이버 프롤레타리아라고 해요.“
이제 이 세상은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을 거쳐 플랫폼직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거예요. 리어카 대신 앱으로, 폐지 대신 일거리를 주울 것이다. 폐지 줍는 노인이 아니라 플랫폼 노동하는 노인으로 불릴 것이다.
배달 드론이나 무인배송 트럭.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드론이나 무인 배송 트럭이 인명 사고를 일으켰다고 가정해 봐. 그러면 회사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잖아. 그런데 우리 같은 긱 노동자를 고용해서 독립 계약자의 지위를 주고 일을 시키면 비용이 훨씬 적게 들어. 우리한테 사고를 다 떠넘기면 되니까.
친구들은 양천식이 대출도 없고 아픈데도 없고 사위와 사이도 좋다며 그 비결을 묻는다. 건강검진을 안 받아 어디가 아픈지를 모르고 대출도 자격이 안 돼서 못 받고 사위와 사이좋은 이유는 둘 다 실직. 무소득자이기 때문이라고 차마 말 못 한다.
생계 때문에 덮고 지나가려고 했던 것들이 서서히 보였다. 그들은 모두 이어져 있다. 총체적 가해의 형태를 이해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수경은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떠올렸다. 모여서 같이 고민하고 고통에 동참한다고 대책이나 결론이 쉽게 나는 것은 아니고 고민만 나누다 그칠지 모르지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덮어놓거나 남자가 없는 곳의 일만 하거나 엄마가 계속 보호하며 따라다니거나 운이 없었다고 치부하거나 돈이 없어서 그런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기적이다
이 일은 폰만 있으면 집, 학교, 무덤가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이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벌지 못해 일을 그만둔다면, 그것은 회사가 해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은 회사가 그들을 해고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저 더 많은 돈을 벌기 이해 다른 곳으로 더 나는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