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피아노 콩쿠르 참가기 (2/3)

8th Cliburn Amateur (Oct. 12-18, 2022)

by andy

Preliminary Round. 1라운드에 주어진 연주시간은 15분. 지정곡은 없다. 다만 모든 라운드에 걸쳐 제시된 권고사항은 ‘가급적 다양한 시대와 작곡가의 작품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할 것’


몇 차례 변경 끝에 베토벤 소나타 30번 Op. 109를 1라운드 곡으로 선택했다. 고전시대의 완결자이자 낭만시대를 예고한 베토벤의 이름에 실린 무게감, 소나타라는 기악형식이 갖는 음악사적 중요성, 후기 소나타가 표현해야 하는 다층적, 복합적인 질감과 뉘앙스를 생각할 때, 그리고 지난 200년간 전세계 어딘가에서 적어도 하루 한번은 공연되었을 이 곡을, 다음 라운드에 가야할 이유를 입증해야 하는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은 과연 현명한가... 어찌됐든 3년을 준비하고 13시간을 날아가 갖는 첫 15분이 마지막 무대가 될지 여부는 이 곡에 달려있다.


콩쿠르 참가자들에게는 매일 4시간의 연습시간이 보장된다. Bank of America 빌딩 6층에 마련된 연습공간에 연습용 업라이트 피아노 수십 대와 웜업용 그랜드피아노 2대가 놓여있다. 휴게실로 통하는 복도에 다른 참가자들의 연습 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슬라메이, 쇼팽 에튀드 3도, 리스트 라발스… 소리로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들은 무시무시하다.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이렇게 무서울 수 있다니.


그때도 그랬다. 국민학생 때 학교 대표로 음악경연에 참가하곤 했는데, 다른 애들은 어찌 그리 다들 자신만만하고 잘 부르는지… 복도에 잠시 서서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한다. 추가 연습시간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휴게실에서 간혹 마주치는 참가자들과는 서로 어떤 곡을 연주하는지 묻고 답하며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칭찬을 곁들이고 행운을 빌어준다. 넌 잘 할 것이며 우리는 아마추어니까 결과에 연연하기보단 과정을 즐기라는 주문같은 말은 상대에게 건네는 덕담이자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이런 무대를 즐긴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일까…


첫음을 누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대체로 자율주행 모드에 들어간다. 수많은 반복을 통해 획득된 소위 머슬메모리에 의존할 수 없다면 피아노 연주는 불가능할 것이다. 수천 개의 건반들을 누르는 손가락 순서와 타건의 세기, 길이, 타이밍을 전부 인지의 영역에서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뇌는, 반복을 통해 손가락의 움직임이 각인된 소뇌의 작동을 믿고 가령 선루프 개폐, 입출구 진입 같이 인지적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만 적절히 개입하면 된다. 그런데 긴장도가 높은 환경에서는 사람이 자율주행에 과도하게 개입해서 시스템이 교란될 수 있는데, 변주곡 형식인 3악장에서 제3변주의 왼손 스케일 때 그랬다. 한번 손이 꼬이자 불안감은 증폭되고 다시 손이 꼬이는 악순환의 반복 끝에 간신히 제4변주로 넘어갔다. 연주를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나와 한숨을 쏟아내자 참가자 몇 명이 다가와서 따뜻한 칭찬과 위로를 건넨다. "아름다운 연주였다. 너 심정을 알지만 실수는 중요하지 않아. 자신에게 친절하길 바라."


내 생애 가장 밀도 높은 15분이 지나갔다. 아쉬웠던 부분들을 되새김질한다. 그러나 내가 과연 오늘밤 그 무대에서 그보다 더 잘할 수는 있었을까. 회한 대신, 내가 원했던 소리, 청력 상실과 육체적 질환으로 인한 고통과 고립감 속에서 베토벤이 어쩌면 구원을 갈구하듯 그려냈을 그 소리들에 한발짝 가까이 다가간, 찰나와 같지만 아름다웠던 순간들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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