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2. 꽃과 사람
꽃 같은 시절
아이들이 찾아왔어요.
예쁜 아이는 꽃보다도 아름답게 피어나고.
저보다 더 고운 잉태의 계절.
꽃보다 애틋해서 그리웁고
꽃보다 아련해서 가여운
간직할 수 없음이라 허망한 존재성.
그래서 그러셨나요.
아예 때리지 말라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하셨던가요.
꽃과 사람
꽃은 막바지까지 곱디곱다 마침내 씨알 하나 콕•콕• 찍고 홀홀
떠나시던데,
잠시 잠깐 처음 동안만 꽃 같던 사람
홀아비꽃대 하얗게 촛대를 밝혀도 암흑처럼 애달픈
어두운 미래.
너무 일찍 씨를 맺어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게 어디
마침표뿐이겠습니까.
그래서 그러셨나요. 어른은 모두 아이에게서 왔으므로 ‘내 안의 아이’를 찾아 자신을 지키라 하셨던가요.
만일 내가 꽃과 같아서
마지막 순간 오십 말에 아이를 낳았다면 '첫 기억'으로 하늘을 보고 활짝 웃는 엄마 얼굴을 선물했을 거예요.
삶은 아름다운 것이므로 (『Life Is Beautiful』) 날벼락을 맞을까 똥물이 튈까 몸을 사리던 그 모습이 아니라
시련과 장애물 앞에서 게임 하듯이
즐겁게 뛰어넘어 보자고 손부터 내밀었을 거구요.
‘귀도 아빠’가 그랬듯이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으로 삶을 경험하게 하면서요.
아이는 천 점을 따서 땅에서의 꿈을 이루고
나는 홀홀 천상을 날고
그러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평화로워졌을 겁니다.
그동안 내가 저지른 많은 잘못 중에서 최악을 꼽으라면
아이의 속마음을 따라가며 세심하게 읽어주지 못해 귀한 감정을 지켜주지 못한 것입니다.
삶이 시간이라면 사랑은 함께 하는 시간일 텐데
나는 아이에게 펜과 키보드로 싸우라고, 손가락으로 이기라 했어요.
엄마 방식이 절망의 이유이었으면서
대안이 없어 어쩌지 못하다
험악한 전쟁터에 내보내는 기분으로 ‘엄마 mothering’를 한 것 같습니다.
아이가 방심할까 뒤처질까 걱정했던 게 혹시 자신을 의심하게 만든 건 아닌지……
만약 그 애가 열등감과 우월감을 오가고 있다면 그것도 내가 만들어준 겁니다.
나는 내 가문의 탐욕도 이기지 못한 것처럼
저 사회의 시뻘건 집단 이기심에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나마 엄마를 이해하게 된 건 순전히 아이 덕입니다.
그렇더라도 엄마라는 처지가 내린 결정에 수긍했다는 의미일 뿐, 어리석은 답습에 몸서리쳐야 했습니다.
탯줄이 끊기고 울던 아이는
젖줄을 물고야 비로소 안도하는데
막상 실전에 던져지면 세상은 금줄에 열광하고 있었어요.
모범답안이라 칭송받으며 세상의 중심에 선 탐욕스러운 노인이 수족관을 좋아했거든요.
그냥 노크하듯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는데 놀란 정어리 떼가 방향을 바꾸는 꼴에 재미가 붙었는지 자꾸 툭툭
이번에는 소리를 쳐봤어요.
“내 핏줄아, 돈줄이 목줄이니 잘 지켜라.”
그러면 너도나도.
한 달 카드 대금에 헐떡이는 사람들이 당황할수록 부익부 줄이 길어졌지요.
비 맞는 사람에게 거저 우산을 씌워줄 리 없으므로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뒷거래를 해서라도 줄을 잡아야 했어요.
싸움이 끊이지 않는 빌딩 숲은 각자의 최선이 모인 총합(總合)입니다.
들풀은 삶의 과정이 합(合)을 이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탄광촌이든, 가파른 절벽이든, 동토든, 공중화장실 벽 모서리이어도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어디서든 동글동글 씨앗을 맺는 일이 제일 중요한 작업이니까 가장 뒤로 미뤄놓고는,
나비를 기다리기로 했어요.
거친 바람, 모진 폭풍우, 땡볕 가뭄, 병충해…… 수목한계선에 닿은 듯이 끝이 없는데, 피해 다니지 않고 오롯이 정갈하게 집중했지요.
외부 환경과 싸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힘을 모으는 응축의 시간.
흔들리다 일어서고 또다시 일어설 때마다 뿌리가 깊어진, 그 자리에서 다만 몰입으로 꽃 한 송이를 피워내 자신을 지키면
벌이 다가오고 나비가 날아와 훗날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
이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꽃은 벌써 알고 있었어요.
저 너머 그리움
씨알에 콕•콕• 박아두고 맑은 숲에다 향기만을 담아두고는
나비 날개를 빌려 일곱 빛깔 무지개를 타고 넘보라살로 떠났어요.
본 게임을 치르는 새 아이처럼 한계를 넘어갔어요.
혹시 탐욕스러운 노인은
우주를 한가롭게 유영하는 비행사가 모선(母船)과 연결된 줄을 통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럴 때만 순진한 아이처럼 삶도 그럴 거라 기대한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