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퇴사 이야기 (3)
퇴사 STEP 1.
퇴사 통보와 사직서 수리
사실 웬만하면 3년은 채우고 그만두고 싶었다. 아무리 물경력이라 한들 구직시장에서 3년은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간. 아니, 물경력이 될 가능성이 높기에 3년이라도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직장 생활과 이직 활동을 병행하려고 했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3년차 사원은 '논문'을 쓰고 발표해야 대리로 승진시켜 준다는 사규 때문이었다. 이 '연수논문'이라는 제도에 대해서도 할말이 참 많은데, 여기서는 "나는 도저히 논문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도만 밝히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애초에 내가 희망한 퇴사시점은 2019년 7월 혹은 8월이었고, 이직할 회사가 확정되기 전에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 잠자코 있다가 이직이 확정된 후 노티스해야만 했다. 그러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인 3월 초에 퇴사 의사를 밝히게 되었다.
내 후임으로 일할 사람을 충원하려면 내 사직서가 시스템 상에서 결재 완료되어야 한다며 바로 결재 상신할 것을 강요 받았다. 퇴사 진행에 있어 사직서 수리는 당연한 수순이지만 내 의사와 상관 없이 퇴직일을 결정하는 것은 명백히 회사의 강요다. 나는 분명 한 번 더 7월 말일자로 사직서를 올리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내 후임을 뽑기 위해서는 6월 말로 결재를 올려야 한단다. 아니, 자발적으로 퇴직하는 마당에 회사가 퇴직일을 정해줄 수 있는 거였던가? 내가 원하는 퇴사일보다 이른 시기에 퇴사하라고 하면 그건 퇴사일까지 남은 기간과 상관없이 권고사직 아닌가?
비합리적인 처사라고 느꼈지만 그간 쌓인 것도 많고 모든 것에 환멸나는 상황이었기에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퇴직서를 상신했다. 결과는? 일주일 만에 사장 결재까지 완료! 제발 빨리 나가달라 레드카펫 깔아주고 문 열어주는 느낌, 아마 당해보는 사람만 알 거다.
퇴사 STEP 2.
마지막 출근일 정하기
퇴직서 결재가 완료되었으니 이제는 마지막 출근일을 정할 차례. 그런데 사장 결재까지 다 나고도 3주 가까이 후임을 안 정해주더라. 어찌저찌 후임 정해지고 인수인계 시작하기까지 한 달 이상 시간이 소요됐다. 이 시점만 하더라도 나는 잔여연차를 소진해도 6월 중순까지 출근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인수인계에 할애할 시간이 넉넉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차장이 오더니 2019년도에 새로 부여된 연차를 모두 소진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돈으로 줄 수는 없지만 반드시 다 써야 하는 건 아니다"고 덧붙였다. 6월 중순까지 나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뉘앙스였다. 연차수당을 지급해준대도 근로자에게는 연차 소진이 유리하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상식. 그래서 정 내가 필요하다면 사직서 날짜를 7월 말로 바꾸면 어떻겠느냐 물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된단다.
면전에다 대고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건 아시죠?"라고 퍼붓고 싶었지만 나가는 마당에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 하루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했다. 다음 날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남은 연차 다 쓰고 나가겠다고 통보했다. 회사와 회사 사람들은 나의 편의를 봐주지 않는데 아주 조금이지만 미안한 감정이 생기려 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 회사에서의 경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자조적인 생각도 들었다.
퇴사 STEP 3.
드디어 인수인계, 하지만..
마지막 출근일을 정한 후 나는 내가 맡은 업무를 누군가에게 인계해야만 했다. 그런데 대체 왜 내가 하던 일을 어떻게 나눠서 받을 지 결정하는 데만 한 달이 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인수인계를 해주려고 해도 다들 미적지근한 반응인지. 이러다 나중에 또 뒤에서 엄청나게 씹어대겠구나 싶어서, 그리고 내 후임으로 일하게 될 후배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인수인계 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 회사에서는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인수인계 파일을 넘겨주고, 신입 역시 누군가 남긴 인수인계 파일이나 매뉴얼을 보고 일을 배우는 게 당연한 관행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회사, 특히 이 부서는 놀랍게도 매출액에 비해 체계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신입에게 일을 가르칠 때도 선배가 그저 말로 설명을 해주고, 논리정연하게 큰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해주지도 못하면서 이해하지 못한다며 면박을 준다. 서류 하나를 만드는 데 고칠 부분을 한 번에 지적해주지 않아서 대여섯번 이상 고쳤던 파견사원도 있었다. 모름지기 신입은 깨져가면서 일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너무나도 많은 모양이다. 나는 경험과 실패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는 부분에는 동의하지만, 위의 예시와 같이 필요 이상으로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면박을 주는 태도는 직장 내 괴롭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서야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된 게 찔끔 억울한 측면도 있다.)
아무튼 나는 그 누구에게도 받은 적 없는 인수인계 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껏 팀 차원에서 그런 자료 하나 체계적으로 만들 생각 못 했던 인간 군상들이 내가 만드는 파일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려 드는 게 아닌가. 내가 일이 너무 많아서 야근에 시달릴 때는 "네가 대체 뭐가 그리 일이 많아서 매일 같이 야근을 하는지 모르겠다"던 분들이 "ㅇㅇ씨 이런 일도 했어? 좀 더 자세히 써 봐. ㅁㅁ 부분도 추가 좀 해 놔줄래?"라니. 정말이지 인수인계 받은 적 없어서 3달 동안 혼자 삽질하며 터득한 업무도 인수인계서를 작성하라고 하질 않나. 인수인계를 진행하면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있던 정 없던 정 오만 정 다 떨어졌다.
덕분에 마지막 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 할까?
덧) 퇴사를 고민하는 사회 초년생들에게.
어렵게 들어간 회사더라도, 고인물들이 일진놀이를 하고 있다면 최대한 빨리 그만두자.
갈 곳 없는 고인물들의 일진놀이를 신입 입장에서는 피할 길이 없으며 당사자의 멘탈을 갉아먹을 뿐이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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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이미지가 없는 게 서운해보여 유럽여행 중에 스페인 톨레도에서 찍은 사진 올려봅니다. 저는 10월부터 도쿄에서 새로이 회사 생활을 시작할 예정이구요, 도쿄에서의 직장생활과 일상, 정치와 역사 등 에세이를 주로 올려보려고 해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다른 글들도 읽어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