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다. 병든 아내를 잃고 50년 만에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쓸쓸한 남자. 훌쩍 자란 딸이 있지만 온전히 혼자여야 하고 혼자인 것 같은 남자. 내면에 슬픔이 가득하지만 어떻게 분출해야 할지, 아내가 없는 낯선 감정을 처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픈 추억이 깃든 바닷가에서 그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의 작디작은 배들이 아닌가, 어두운 가을을 헤치며 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72~73쪽)’ 라고 말한다. 마치 종류는 다르지만 이 슬픔이 자신만의 슬픔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다른 도시에서 살았던 집이 꿈에 계속 나온 일이 있었다. 집 구조가 생생했고 눈을 감으면 그 집으로 가는 길까지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리움 때문이라 여겼지만 다시 그 집에 가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바다』의 주인공 맥스처럼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무슨 감정을 지니고 그곳을 방문하게 될까? 현재의 모습을 잠시 제쳐두고 그곳에 살았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될까? 나도 오롯이 혼자일까? 맥스가 한때를 보낸 바닷가를 다시 찾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데 나는 도대체 그곳에서 무얼 찾고, 보고 싶은 걸까?
‘기억은 움직임을 싫어한다. 사물을 정지된 상태로 유지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 (206쪽)’ 했는데 정말 그럴까? 맥스는 모든 게 변해 버린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바닷가에서 천천히 그 여름을 떠올린다. 떠올리지 않아도 스스럼없이 드러나는 기억의 파편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그것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고통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기억 중의 하나를,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게 내겐 용기로 보였다. 자신의 이상을 편입하려 했던 그레이스 가족. 그 가족과 함께 하고 딸 클로이에게 느꼈던 연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클로이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와 함께 여전히 클로이는 자신에게 어린 소녀였고 과거의 기억이 그대로 거기서 멈춰버린 듯했다.
‘정말이지 기억하려는 노력만 충분히 기울이면 사람은 인생을 거의 다시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151쪽)’며 그는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한 때를 보낸 바닷가에서 아픈 과거를 들추었지만 맥스가 살아야 할 시간에는 현재와 미래도 있었다. 아내와의 추억과 그녀가 남겨준 것들과 딸과의 새로운 관계도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맥스는 아내를 잃었다는 상실로 인해 깊은 슬픔을 맛보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새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맥스가 아픈 기억이 있는 바다를, 아내를 잃은 뒤 혼자가 되어 다시 찾은 이유가 오로지 과거의 기억 속에 자신을 감추려는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래도.(62쪽)’ 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그 아픈 기억을 다시 들춰내는 걸 보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으려구나 지레짐작 했다.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이 삶을 떠나기 위한 긴 준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라던가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물론 우리 가운데 어떤 것은 남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지금 우리이고 전에 우리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죽은 자의 먼지일 뿐이다.(114쪽)’ 는 말들 속에서 깊은 회한보다는 이미 흘러와 버린, 여전히 흘러가고 있는 삶을 처연히 마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도, 아픈 기억이 있는 바다도, 그 이후에 지금껏 살아온 삶도, 앞으로 마주하게 될 삶도 있는 그대로의 고백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진짜 과거는 우리가 그런 척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148쪽)’는 말처럼, 그래서 오랜 세월 후 마주하게 된 V양이 “그래서 지금도 여기 있는 거예요.”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까지.” 라고 고백하고 그녀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마음 한구석이 뭉클하면서 눈물이 맺힐 정도로 잊힐 것 같던 오랜 기억에 대한 애잔함이 올라왔다.
약 십 년 전에 읽었던 소설이 재출간 되면서 재독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더 흐른 뒤 다시 읽어 보기로 다짐했다. 맥스와 비슷한 나이대가 되었을 때 이 소설이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해진다. 그때까지 내 삶을 마주하고 있다면, 내가 현재 살아내고 있고, 과거에 살았던 삶들을 맥스처럼 진지하고 거리낌 없이 고백할 수 있을까? 현재를, 미래의 과거가 될 현재를 진실하게 살아야겠단 진부하지만 삶의 진실이 맥스의 고백 속에서 그렇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