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스 Sep 03. 2020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 괜찮아

친구에게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중학교 동창 아이가 죽었다고.

스물셋, 넷, 그 언저리 즈음의 나이에 친구 부고는 처음이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냐고 물어보니,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나는 그 아이와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아는 사실이라고는 공부를 잘했다는 것.

당시 크게 유행했던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친구네 어머니께서 정성이 대단하셨다는 것.


사실 이런 건 흔히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꽤 인기가 많았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도 다루었지만,

입시로 인해 극성인 부모님이 대한민국에서는 꽤 흔하고, 어쩌면 평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옛날에 흔한 자기소개서 멘트로,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밑에서 자라~~"가 있었다면,

요즘에는 "제 공부에 정성을 쏟으시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관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공부에 어느 정도 소질이 있는 아이에게 동기 부여를 해주고, 피드백을 해줌으로써 더 나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결과가 좋지 않아도 사실은 큰 문제는 아니다.

어찌 되었든, 최선을 다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안 된 거니까.


문제는, 저렇게 정성을 쏟는 어머니들 밑에 있는 말 잘 듣는, 착하고 똑똑한 아이들이다.


파리에서 교육학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프랑스 학교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아이들은 반항적이고, 싸움을 하는 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얌전하고 조용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아이들을 지켜본다고.


"사춘기"란 그런 시기라고 한다.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뛰쳐나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그런 시기.

때문에 싸우고, 반항적인 면모를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춘기 시절에 반항 한 번 못 하고 얌전히 말 잘 듣는 친구들은 어쩌면 속에 활화산 하나를 숨겨두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친구들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조차도 못한 채 스스로를 키우지 못한, 그런 덜 자란 아이일지도 모른다.


부모 입장에서는 착한 아이들이 편할지도 모른다.

당장 우리 아이는 착하고 말 잘 듣고, 공부를 잘하니까.

하지만 그 아이는 수백 마디를 속으로 삼키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문드러진 채.


나는 정말로 그 아이를 잘 모른다.

내 멋대로 몇 번 마주친 그 아이를, 지인들의 몇 마디를 통해 상상하고, 내 주변 인물들을 투영해서 그려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내 멋대로 동정하고 슬퍼하는 실례를 저지르고 있다.


그 아이는 공부를 잘했다.

소문에 무지했던 나조차도 이름 세 글자를 기억할 정도로.

치기 어린 마음에 주변 친구들은 조금 재수 없게 보았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 아이와 친하지 않아서 실제로 어떤 성격인지는 몰랐다.


그 아이에겐 친구가 있었다.

둘이 정말 마음속으로 정말 친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둘은 붙어 다녔다.

어머니들끼리도 친했다고 했다.

학원이나, 뭐, 그런 것들을 공유했고, 그 아이는 친구가 하는 거의 모든 걸 해야 했다.


한 번은 사건이 있었다.

그 아이가 다른 친구들의 커닝을 도왔다고 했다.

글쎄, 진실은 알지 못한다.

내가 보지 못했던 일이고, 너무나 먼 남의 일이었으니.

다만 결말만 알고 있다.

뻔하디 뻔한 결말이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나서서 해결했다는 결말.

좋은 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이 사건이 발목 잡으면 어떡하냐고 했단다.


그렇게 그 아이는 좋은 학교에 진학했다.

그 아이의 친구는 더 좋은 학교에 진학했다.


나는 그렇게 그 아이의 소식은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 아이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그 아이와는 친하지 않았으니.


그래서 그다음에 들은 소식은 그 아이의 부고였다.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고 했다.

계속 준비했던 시험이 잘 안 됐고, 그와 관련하여 교수님과 갈등이 있었다고 했다.

유서는 없었고, 무엇이 그를 괴롭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가 안타까웠다.


누가 봐도 좋은 학교였고, 누가 봐도 그 아이는 수재였다.

밖에서 들여다보았을 때, 꼭 그 시험이 아니더라도 그 아이는 무엇이든 잘할 것 같은 아이 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죽음을 택할 만큼 괴로웠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하는 것 같지 않고, 계속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은 그런 막막함.

그런 막막함에 숨이 막혀 가는 사람들.


주변에 그런 친구가 많았다.

아니, 사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어쩌면 내가 그 아이를 연민하는 건 지독한 자기 연민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막막함 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는 그저 그게 대단해 보였고, 나는 하잘 것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 걸음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보았을 때, 사실 그 막막함이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사실 그 막막함을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사람인데,

발목 만치 오는 늪이 코 아래까지 온다고 착각하고 허우적댔던 것일 뿐이었다.


엄마 말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왔는데,

옆에 있는 친구들은 나보다 늘 앞서 있는 것 같고, 나는 그것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못난 것 같고,

준비하던 것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


사실은 나는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고,

밖에서 볼 땐 준비하던 게 아니더라도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 그 아이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죽음을 택하지 않아도 여러 갈래의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 길들을 보지 못하도록 눈 앞을 가린 것은,

늘 그에게 뛰어나야 한다고 속삭였던 말들이 아닐까.

아직도 크지 못하고 아이로 남은 바람에 벗어나지 못했던, 착한 아이의 콤플렉스가 아닐까.


그 아이는 실패한다고 생각했겠지만, 누구보다 노력했던 그 과정이 그 아이에게 남아 있었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도 그 아이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어서, 실패를 했던, 노력하지 않았던, 충분히 괜찮았을 텐데.

아무도 그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미 너무 늦어버렸지만 지금이라도 그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아이에게, 힘들어하는 내 친구에게.

그리고 나에게.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작가의 이전글 #인간관계에 대한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