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 사이카성 공방전

by 기억흡수

“각자 위치에서 대기하라! 집중해! 너희들의 임무는 적의 예봉을 꺾고, 집결지로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다.”


사이카슈의 원로, 야마자키의 외침이 그림자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검은 봉화가 네고로지의 산등성이를 뚫고 치솟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의 표정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니시아치, 사사에몬! 서쪽을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니시아치가 칼자루를 꽉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스즈키 잔당이든 하시바군이든, 모두 증오의 대상이었다.


“감정은 칼날을 무디게 한다고 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다.”

“흥분한 것을 보니, 아직 젊군. 니시아치.”


사사에몬은 니시아치를 보고 웃으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니시아치는 칼자루를 움켜쥐었던, 흉터와 굳은살이 가득한 손바닥을 펴 천천히 바라보았다.


‘흥분이라···. 카츠류우, 그 녀석 때문일지도 모르지.’


언제나 무표정하던 니시아치의 차가운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코우나이, 준시로는 동쪽으로!”

“여긴 문제 없습니다. 차라리 떼로 몰려와 줬으면 좋겠군요. 한 번에 다 쓸어버리게요! 크하하핫!”


코우나이는 밝게 웃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준비한 폭약의 함정들은 전부 치명적인 것이었다.


“료에몬, 북쪽을 부탁한다.”


야마자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료에몬을 바라봤다. 그는 사이카슈 5인방 중 가장 강했지만, 매사에 긴장감이 없고 몸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여전히 나른해 보이는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요즘 따라 낮잠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아서 말이죠. 아저씨들은 잠을 못 자면 피부가 엉망이 된다고요?”

“에잉···. 쯧. 아이들을 부탁함세.”

“그 녀석들이야···. 뭐 알아서 잘하겠죠. 그럼 갑니다?”


료에몬은 두 자루의 칼을 어깨에 둘러메고 느릿한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미카즈키~ 그 얼빠진 두 녀석 데리고 따라와라.”

“저희요? 넵! 갈게요! 야, 빨리 따라와 이건 흔치 않은 기회야. 료에몬 스승님의 전투를 볼 수 있어!”


미카즈키의 폭력적인 오른팔이 하늘 위로 향하자 카츠류우와 하야토는 재빨리 따라붙었다.

검은 연기가 뿜어나오는 네고로슈의 봉화.

산새들이 모두 날아가 버린 적막한 숲.

폭풍전야 같은 이때, 료에몬과 뒤를 따르는 세 사람의 진군은 마치 여행을 떠나는 듯 즐거워 보였다.


“이봐, 카츠류우라고 했나?”

“예. 많이 배우겠습니다.”

“뭘 배워? 가르치기 귀찮아. 워이워이”


료에몬은 손사래를 치며 귀찮은 일이 늘어나는 것을 온몸으로 사양했다.


“네 녀석은 눈에 힘 좀 빼거라. 무슨 전쟁터 나가는 것도 아니고.”

“스승님, 저희 싸우러 나가는 거 맞는데요?”

“뭐, 그렇긴 하네···? 그래도 이놈들아, 고작 이걸로 긴장하고 다니면 나중에 큰일 못한다?”

“얘네는 지금 당장 한 사람 막기도 벅찰 거예요.”

“미카즈키, 넌?”

“전, 일당백이죠!”

“아하하, 그래! 싸움은 기세야. 든든하구나! 이 싸움, 너에게 맡기겠다.”


‘···예? 저, 스승님? 지금 제자를 사지로 보내시는 겁니까?’


카츠류우와 하야토 앞에서 큰소리친 탓에, 반박하지 못한 미카즈키였다.


“저··· 저도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싸움은···, 정말 무서워요.”

“하야토, 네 코가 없으면 우리는 장님이나 다름없다.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해.”


'탁!'


미카즈키가 손바닥으로 하야토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야, 긴장 풀어. 별거 아냐. 전국 최강의 남자가 우리랑 같이 걷고 있잖아! 가보자고!”


선두에서 씩씩하게 걷는 미카즈키.

그녀의 팔에 목이 휘감긴 채 질질 끌려가는 하야토.

눈을 부라리며, 언제든 발검할 태세를 하며 걸어가는 카츠류우.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느긋하게 걸어가는 료에몬.

죽음이 넘쳐나는 전쟁터를 향한 네 사람의 발걸음은, 꽃길이라도 걷는 양 경쾌했다.






밤이 깊어가는 사이카성 내부는 음산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스즈키의 무사 일백과 코우가 닌자 이십이 사이카 마고이치를 찾고 있었지만, 넓디넓은 성안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한 무의 공간이었다.


“이상하다···. 너무 조용해.”

“우리가 올 걸 이미 간파했군. 사람이 하나도 없다. 조심해, 모두 흩어진다.”


스즈키의 무사들이 흩어져 복도를 수색하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건 오직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의 박동뿐이었다. 이따금 얼굴에 닿는 바람의 감촉마저 위협처럼 느껴졌다.


“모리마사가 정말 여기 있는 건가···?”

“쉿, 조용히 해!”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망자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였다.


-커억.

-끄르륵···.


그 목소리와 동시에 무사 두 명이 목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어둠 속에 그림자처럼 나타난 무언가가, 소리도 없이 그들의 급소를 베었다.


“좌측! 무언가 있”


-슥.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하나가 비틀거리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피도 외침도 없이, 그저 바람이 스치듯 목이 갈라졌다.


-슈욱. 푹.


숨죽인 쿠나이 하나가 어둠을 가르고 날아와. 한 사람의 관자놀이를 정확히 꿰뚫었다. 이번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또 하나가 허물어졌다.


“뒤, 뒤다! 커헉.”


뒤를 외치던 무사의 입안에 칼끝이 밀려 들어와 목뒤를 뚫고 나왔다.


-슥.

-스슥.

-슥.


발소리조차 없었다. 그러나 각각 떨어져 있던 세 명의 무사가 거의 동시에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남아있는 스즈키 무사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번지며 그들의 손이 떨렸고, 본능이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침묵 속. 유일하게 들리는 것은, 목이 잘려 나가며 살점이 찢어지는 축축한 파열음과 숨이 끊어지기 직전, 허공을 붙잡으려 허우적대는 손끝이 남긴 조악하게 벽을 긁는 소리뿐이었다. 남아있는 스즈키 무사들의 마음속에는 공포가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번졌다.


“이···, 이게 무슨. 모두 물러나! 밖으로, 당장 밖으로 나가. 어서!”


은은한 달빛이 드리우는 복도의 맨 끝.

아주 미세한 빛을 찾아 움직이는 불나방처럼 스즈키의 무사들이 모여들었다.


-탕!


마고이치가 잡고 있는 철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콰과광!


탄환은 숨겨두었던 폭약통에 정확히 적중했다. 강력한 폭발과 함께 난간, 벽, 목재, 사람이 한 덩어리로 섞여 공중에 흩날렸다. 한순간에 학살을 선보인 사이카 마고이치는, 다시 어둠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한편, 성의 다른 구역에서는 코우가 닌자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개미 새끼 하나 안 보이는군, 계획이 어긋났어. 전원 돌아간다.”


그때였다.


-콰과광!


“뭐, 뭐냐!”


성 아래쪽 복도를 지나던 코우가 닌자들은 격자로 된 나무 살 창을 통해 굉음이 일어난 곳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건물이 무너지고 화염이 터져 나오며, 스즈키 무사들 몇이 불길에 휩싸인 채 튕겨 날아갔다.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화염에 눈길을 빼앗긴 순간.


-휘리리릭.

-휘리리릭.


어둠 속에서 날아온 별 모양의 수리검이 코우가 닌자들을 향해 쏟아졌다.


“적습이다!”

“전방에 적···!”


-휘리리릭.

-휘리리릭.


하지만 공격은 사방에서 동시에 날아왔다. 완벽한 매복이었다.


“이가의 원수들아, 여기서 죽어어엇!”


핫토리 마도카의 분노에 찬 외침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3년 전 불에 타 사라진 고향의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


“3년 전 우리 마을을 불태워 몰살한 빚, 오늘 모두 받아 가겠다!”


마도카와 함께 온 이가 닌자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에는 복수의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3년 전 살아남은 이가 닌자는 많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모두는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이가 놈들이 이렇게나 살아있었나? 모두 죽여라!”


코우가 닌자들의 우두머리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스쳐 갔다. 이가는 완전히 멸망하고 살아남은 이가 몇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순식간에 성안은 두 닌자 집단의 혈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가와 코우가, 3년 전부터 쌓인 원한이 폭발했다. 서로 다른 닌자술이 맞부딪치며 피로 물든 공기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히야아아!”

“으아악!”

“이가 새끼들이!”

“뒈져라, 코우가!”


쿠나이가 가슴에 박힌 채 칼을 휘두르는 코우가 닌자만 보더라도 이들이 얼마나 독한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가의 원한과 광기는 더욱 섬뜩했다. 두 다리를 잃고도 기어서 코우가의 허벅지에 칼을 박아 넣고는 숨을 거두었다. 정면에서 칼을 맞고 기우뚱했지만, 코우가 닌자의 품에 쓰러져 목덜미를 입으로 뜯어냈다. 등 뒤를 허용한 상황에 자신의 배를 찔러, 관통시켜 뒤에 있던 이와 함께 허물어졌다. 이곳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 없는, 원한과 살의만이 가득한 아비규환이었다.

마도카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린 이가 닌자였다. 아무리 많은 일을 겪었다지만, 아직 약관도 되지 못한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잔혹한 광경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둔해진 사이 온몸이 피로 낭자한 코우가 닌자 셋이 덤벼들었다.


“마도카!”


동료 이가 닌자의 비명 같은 외침이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총성이 울렸다.


-탕! 탕!


덤벼들던 코우가 닌자 둘의 가슴이 뚫리며, 벽을 향해 튕겨졌다. 소리에 놀라 멈칫한 하나의 목에는 마도카의 칼이 정확히 날아와 그어졌다.


“늦었나?”


사이카 마고이치가 철포 여러 자루를 둘러멘 채 나타났다. 그의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 피는 모두 적들의 것이었다.


“모리마사 아저씨!”


마도카가 안도하며 외쳤다. 그의 등장으로 호각이던 싸움이 확실히 기울어졌다.


“저 좀 도와주세요!”

“당연한 일이다. 정비해라.”


마고이치는 철포 세 자루의 길이가 조금씩 다른 심지에 화승을 갖다 대었다.


-탕! 탕! 탕!


혼자서 삼 연사. 세 발의 총성이 복도를 찢자, 코우가 닌자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마고이치의 등 뒤에서, 기세가 오른 이가 닌자들이 더욱 날카롭게 날뛰며 전장을 휘저었다.

피로 얼룩진 복도 한가운데. 압도적인 난전 속에 살아남은 코우가 닌자는 단 한 명. 명령을 내리던 이였다. 그는 동료들의 시체에 둘러싸인 채, 절망에 찬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완벽하다 생각했는데, ··· 이가 따위에게 우리가···. 크크크, 콜록.”

“그 독에 닿은 이상, 절대 살 수 없을 거야.”

“안다. 나도 이걸로 끝이군. 하지만 하나의 목적은 달성했다.”

“뭐?!”


마도카가 놀라며 되물었다.


“사이카 마고이치, 아니 츠치바시 모리마사의 위치를 확인했다.”


-펑!


그는 품 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자신의 발아래에 던지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구슬이 터지자 연기가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올랐다.


“크크크, 진짜 사이카 마고이치가 누구인지··· 곧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코우가 닌자들의 생명은 모두 사라졌다.


“위치라···.”


마고이치가 중얼거리자, 마도카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하실래요? 이제 계획대로 빠져나가셔야죠?”

“그래, 더 늦기 전에 나가자. ···잠깐.”


마고이치가 말을 멈췄다.


“마도카, 이가 닌자들을 데리고 먼저 가 있거라. 마무리해야 할 인연이 있다.”

“예? 하지만, ···알겠어요. 무리하지 마세요. 츠키가 슬퍼할 거에요. 저도 무조건 기다릴 테니 빨리 와야 해요.”


이가 닌자들이 어디론가 모두 사라진 뒤.

짙은 연기가 자욱한 불타는 복도의 끝에서 또렷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다가오는 기척. 마치, 죽음이 직접 걸어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어이, 모리마사.”


마고이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게히데···.”


마고이치가 이를 갈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은 할 말이 더 많았지만, 오로지 눈빛만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피어오르던 연기가 사라질 무렵. 스즈키 시게히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네 놈을 아비의 곁으로 보내주지.”

“무서워 도망친 주제에, 말이 많군.”


두 사람의 손이 조심스레 칼자루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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