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 그 아이를 넘겨라

by 기억흡수

시산혈해의 그림자 마을 광장.


전투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기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방금 전까지 하나의 적을 향해 칼을 휘두르던 두 세력, 사이카슈의 검은 그림자들과 토쿠가와의 붉은 군단이 이제는 서로를 겨누며 팽팽하게 맞섰다.

붉은 군단, 적비대는 그야말로 한 폭의 지옥도처럼 보였다. 깃발과 장병들의 갑주는 물론, 마갑에 이르기까지 모두 핏빛으로 통일했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이 전장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그들의 위용은 사이카슈 닌자들마저 숨죽이게 만들었다.

그 붉은 군단의 대장, 이이 나오마사의 창끝은 미카즈키의 품에 안겨 가쁜 숨을 몰아 쉬는 한 소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바타 카츠류우. 꺼져버린 줄 알았던 시바타 가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 아이를 넘겨라.”


이이 나오마사의 모습과 목소리는 아직 젊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시체를 딛고 선 자의 냉혹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런, 이런. 방금 전까지 함께 싸운 전우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흘린 피는 아직 마르지도 않았다고?”


나른한 표정으로 피 묻은 두 자루의 칼을 닦던 료에몬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니시아치는 말없이 칼을 고쳐 쥐었다. 그의 얼음장 같은 살기가 광장을 가득 메우자, 적비대의 군마 몇 마리가 불안한 듯 뒷걸음질 쳤다. 사사에몬은 아예 드러내놓고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소림 끼치는 말을 했다.


“크크큭. 붉은 갑주라. 피가 튀어도 잘 안 보이겠어. 팔? 다리? 어디를 썰어 드릴까?”


하지만 적귀는 적귀였다. 나오마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 적비대가 아니었으면 저기 누워있는 것들은 네 놈들이었을 거다. 너희는 목숨을 건졌다. 그 대가로 시바타의 아들을 원한다. 저 아이는 하시바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다.”


그때, 모두의 앞에 나선 것은 사이카슈의 대장, 사이카 마고이치였다. 그의 표정은 고요한 호수와 같았으나, 그 고통의 깊이를 아는 이들은 긴장감에 자신의 병장기를 꼭 쥐었다.


“적귀. 그대의 도움에 깊이 감사한다. 하지만 카츠류우는 내어줄 수 없다. 인질로써 하시바에게 대항하겠다고?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저 아이는 우리의 대의에 반드시 필요할 뿐,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렇다면, 힘으로라도 막을 수밖에.”


마고이치가 칼을 고쳐 쥐는 순간, 두 세력 간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그 순간, 핫토리 마도카가 둘 사이로 나섰다.


“모리마사 아저씨! 잠시만요. 오해예요. 저 아이를 해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고 하시바 히데요시를 칠 명분을 삼으려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오마사님! 왜 이렇게 일을 어렵게 만드는 거예요. 이에야스 님께서 부탁하신 건 이런 상황이 아니잖아요! 아오, 진짜. 싸움 좋아하는 남자들은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거야.”


마도카는 천하의 적귀라도 무섭지 않은 듯,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냈다. 이이 나오마사는 매일 듣는 잔소리를 들은 것 마냥, 마도카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품 안에서 서신을 하나 꺼냈다.


“주군께서 직접 쓰셨다. 하시바 히데요시를 멸할 때까지의 동맹. 물론, 비공식적인.”

“카츠류우의 신변은?”

“너희들이 지킬 자신이 없다면 언제든지 넘겨도 된다.”

“적의 적은 친구인 법이지. 사이카슈는 토쿠가와와 함께 할 것이다.”


팽팽했던 대치가 끝나자 료에몬이 나오마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봐 빨간 젊은이.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일천이나 되는 병력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카모 우지사토의 영지를 관통해야 하는데, 히데요시의 충견이 네놈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는데 말이야.”

“나리가 계신 곳에서, 이곳까지. 가장 가까운 길은 바다다.”

“천 명을 실어 나를 함대라. 곧 전쟁이라도 준비하려나 보군.”

“알 거 없다. 때가 되면 알 게 될 것이다.”

“이런, 싸가….”


료에몬이 무어라 불만을 말하려는 찰나, 이이 나오마사는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려 적비대를 이끌고 썰물처럼 그림자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림자 마을에는 승리의 함성 대신 나지막한 흐느낌과,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만이 광장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으…, 으윽….”


카츠류우가 눈을 뜬 곳은 익숙한 오두막이었다. 희미한 약초 냄새와 타닥거리며 타는 장작 소리가 고요하게 공간을 채웠다.


“정신이 들어?”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미카즈키의 슬픈 얼굴이 보였다. 소녀의 팔과 허벅지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많이 다쳤잖아. 괜찮은 거야?”


미카즈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순간, 카츠류우의 뇌리로 마지막 기억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의 목소리와 혈풍. 자신이 휘두른 칼날에 찢겨 나가던 사람들. 뼈가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 온 세상을 붉게 물들였던 피의 향연.


“하. 내가…, 내가 무슨 짓을….”


카츠류우는 떨리는 두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피는 깨끗이 닦여 있었지만, 사람을 두 동강 내던 끔찍한 감각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래서였군, 귀신 시바타의 명성…. 정말 괴물 그 자체였던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미카즈키가 단호하게 외치며 소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카츠류우, 너 때문에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었어. 넌 희망이지, 괴물이 아니야.”


그때, 문이 열리며 사이카 마고이치가 들어섰다.


“일어났구나.”

“예….”

“본의 아니게 밖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마주한 힘이 두려운 것이냐. 아니면 그 힘을 휘두른 너 자신이 두려운 것이냐.”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때, 그 순간이 너무 선명해요. 솔직히….”


카츠류우는 말을 꺼내가기가 곤란한 듯, 주저했다.


“솔직히…. 믿을 수 없지만, 즐겼던 거 같아요. 눈앞에서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이는 것이…. 그래서 두려워요.”


마고이치는 카츠류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남들은 귀신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누가 정의하지? 너의 부친은 너를 대할 때 귀신같은 사람이었나?”

“그럴 리가요. 모두가 존경했어요.”

“그래 카츠류우. 폭풍은 어떤 나무를 부러뜨릴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저 폭풍일 뿐이야. 혈풍은 네 안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폭풍이다. 넌 그 폭풍의 눈이 되어 중심을 잡아야 한다. 흔들리지 마. 모든 것을 휩쓰는 바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고이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힘은 네 아버지의 유산이자 시바타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분노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휘둘러야만 올곧은 너의 정신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토쿠가와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니, 네가 짊어진 복수의 무게는 이제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아직 무리하지는 마.”


마고이치의 마지막 말에, 카츠류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맺힌 슬픔은 더 이상 공포와 죄책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짊어지고 나아가겠다는 결의의 빛이었다. 옆에서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미카즈키의 온기가, 그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사카성의 천수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그 위용을 과시하며 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천하인의 거처에 어울릴만한 그 장대함 아래, 한 남자가 초췌한 몰골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즈카타케 칠본창의 필두, 후쿠시마 마사노리였다. 그의 갑주는 군데군데 찌그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분노와 치욕이 뒤섞여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앞에 선 이는 원숭이라는 멸칭과는 어울리지 않게, 천하를 향해 손을 뻗어 거머쥘 듯한 광기를 온몸으로 내뿜는 하시바 히데요시였다.


“그래, 마사노리. 그까짓 산속의 쥐새끼들에게 삼천의 군세가 물어뜯겨서 돌아왔다, 이 말이냐?”


히데요시의 목소리에는 노기보다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장난기가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는 칼날보다 더 아프게 박혔다.


“송구하옵니다. 주군. 변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들었다. 이에야스의 신참 애송이에게 한 방 먹었다지?”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입에서 나온 신참이라는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신참에게 진 패장이라는 상황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이를 본 히데요시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마사노리의 패배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놈들이 왜 거기서 튀어나온 것이냐. 더 중요한 것은, 너구리와 쥐새끼가 손을 잡았다는 것이겠지. 안 그런가?”

“다 이긴 전투였으나,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후방과 측면을 동시에 타격했습니다. 그리고…, 시바타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들었다, 그 녀석이 사이카슈에 있었던 모양이군.”

“그놈…. 시바타의 피를 완전히 이은 모양입니다. 정예병들을 순식간에 고깃덩이로 만들 정도로….”


그제야 히데요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성벽 공사 현장에서 만났던 당돌한 눈빛의 소년을 떠올렸다.

다시 만날 것 같다고 말하던 그 얼굴을.


“키하하하! 그거 재미있구나! 죽은 귀신, 시바타 카츠이에가 아들 녀석 몸에 붙어서 칼춤이라도 추었단 말이냐! 그래서, 그 망령 하나에 토쿠가와의 애송이까지 붙으니 감당이 안 되더란 말이지?”

“… 면목없습니다.”


히데요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마사노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됐다. 고개를 들어라, 마사노리. 승패는 병가지상사 아니더냐. 네놈의 목이 붙어 돌아온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다만…!”


히데요시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돌변했다.


“미카와로 도망친 너구리가 드디어 굴 밖으로 기어 나올 준비를 하는구나. 어린 시바타를 앞세워서 말이지. 좋다, 좋아. 판이 커지면 더 재미있는 법이지. 칠본창의 창끝이 무뎌진 것은 아닌지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물러가라.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일 테니.”

“예! 다시는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겠습니다.”


히데요시는 멀어지는 마사노리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입가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귀신과 너구리라…. 둘 다 내 정원에서 기를 수 있다면 볼만하겠어.”






비슷한 시각, 하마마츠성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공간을 비추는 유등의 잔잔한 등불이 미약하게 흔들리는 방 안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그의 사천왕이 모여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돌아온 적비대의 대장 적귀, 이이 나오마사는 키이 지방에서 하시바 군과의 교전부터 사이카슈와 동맹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막힘없이 보고했다.


“사이카슈의 전력은 소문 이상이었습니다. 특히 사이카 마고이치와 사이카슈 5인방이라 불리는 자들의 무용은 가히 일기당천이라 할 만했습니다.”


이에야스는 턱을 괸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나오마사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귀신의 피를 이은 시바타 카츠류우. 그 소년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소년 주위로 펼쳐진 상황은 경악스러웠습니다. 마치 헤이하치로 님이 휩쓴 전장을 보는 듯했습니다. 도저히 그 어린놈이 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참상이었습니다.”


헤이하치로라 불린 혼다 타다카츠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혈풍, 오다 녀석들에게 말로만 전해 듣던 그것이로군. 사라진 줄 알았던 시바타의 기술이 완벽히 이어졌다. 그 녀석, 한 번 보고 싶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이봐, 제어가 불가능한 힘은 위험하다고. 주군, 시바타의 복수심에 불을 붙인 것은 좋으나, 그 불길이 우리에게 옮겨 붙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이에야스에게 쏠렸다. 그는 한참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깊은 연못처럼 고요했다.


“나오마사.”

“예, 주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예.”

“허나, 굴 안의 호랑이가 굶주려 미쳐 날뛰고 있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 어쨌든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야스는 혈기왕성한 젊은 장수를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 잡아야지. 하지만 어디 내 피를 흘려서야 되겠느냐? 시바타의 아들은 지금 복수심에 굶주려 있다. 히데요시라는 거대한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있지. 우린 그 귀신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사람이면 돼. 녀석의 적이 아님을 명확히 알려주어야지.”


이에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펼쳤다.


“사이카슈와의 동맹이 드디어 성사되었다. 한조! 사이카슈에 물자를 지원하고, 그들의 정보를 우리 것과 공유하도록 해라. 단, 우리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히데요시가 키이의 그림자들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우리는 조용히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린다. 놈이 저들을 얕보고 큰 군세를 움직인다면 그때가! 바로 출병의 기회다.”


그는 지도의 한 곳, 오와리(尾張)와 미노(美濃)의 경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진정한 싸움은 키이가 아니라, 이곳에서 시작될 것이다. 나오마사! 적비대는 잠시 쉬며 전력을 보강하라. 때가 되면, 너희가 히데요시의 심장을 꿰뚫는 창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야스의 눈은 이미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시바타 가문의 복수, 사이카슈의 저력, 히데요시의 오만함. 그는 이 모든 것을 거대한 바둑판 위의 돌로 여기고 있었다. 천하의 향방을 가를 거대한 싸움의 서막이, 그림자 마을의 혈투를 기점으로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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