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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흡수 Aug 09. 2024

임진왜란 영웅전 [한명련]

천민 출신의 조선 4대 양장

1592년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을 시작으로 상주, 충주를 지나 한성이 점령되기까지 불과 이십일.


 관군은 무너지고 그 누구도 왜적을 감당할 수 없던 때 일개 의병 주제에 수백의 적병을 척살하고 놈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인물이 있었다.





"팔도에서 싸우고 있는 제장들 중에 공적이 뚜렷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없는가?"



 선조의 질문에 조정 대신들이 답하길



"천민이지만 한명련이 가장 잘 싸운다 합니다."

"한명련은 역전의 용장인데 아직 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민이자 병졸의 신분이었던 한명련은 정 3품 별장으로 임명되자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 맹활약하였는데

김덕령과 함께 도원수 권율의 좌, 우 별장이 되어 적진을 종횡무진 휘저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으로서 무의 극치를 선보였다.


 왜적을 베어 넘긴 그의 공적과 명성은 터지는 화산처럼 막을 수 없는 용암이 되어 각지의 절도사를 비롯하여 조정대신들, 그리고 선조의 마음마저 흔들어 버렸다.


 이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응서가 한명련을 찾아왔다.



"자네가 그 유명한 신장이로구나. 당장 떠날 채비를 하거라."


"절도사께서 하신 말씀을 알겠으나 먼저 도원수께 아뢰야 합니다."


"그럴 것 없다. 당장 따라오너라."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도원수 권율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병마절도사의 권력을 이용하여 앞을 가로막는 장졸들을 물리치고 한명련은 강제로 자신의 진영으로 이동시켰고 이를 알게 된 권율은 분노하여 김응서의 뒤를 쫓았지만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한명련은 김응서의 휘하에서 여러 작전에 투입되어 언제나 그렇듯 선두에서 활약하며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공적을 높이는데 가장 크게 공헌했다.






 수년간 계속된 왜란과 흉년이 겹쳐 민심이 극도로 흉흉할 때 충청도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왕은 백성을 버리고 떠났으니 우리 대동계가 좁은 길을 버리고 큰길로 가기로 했소."

"스스로 왜적의 침입을 막고 나라를 바로 세울 것이니 모두 일어서시오."


 그렇게 이몽학이 등장하여 왕과 관군을 믿지 못한 백성들의 호응을 크게 얻었다. 고작 수 백이었던 대동계의 무리들은 수천, 수만에 이르렀고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왕이 탄생할 것만 같았다.


...


 하지만 대단하던 대동계의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역모로 몰려 죽느니 이 썩어빠진 나라를 쓸어버리겠다."


 스스로 타락해 버린 이몽학은 홍주성 공략에 나섰지만 각지에서 모여든 의병들의 방해로 나라를 뒤엎을 불 씨마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결국 부하들의 배신으로 이몽학은 죽임을 당했지만 엉뚱한 곳으로 불 똥이 튀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이몽학의 난을 진압했던 선봉장 김덕령, 곽재우, 홍계남 등 여러 의병장들이 난에 가담했다며 모함을 받았다.


"김덕령은 천하의 용장인데 그를 막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선조의 고민에 한 대신이 말했다.


"한명련이 지금 영남에 머물러 있는데 가장 용맹한 자이니 그를 시켜 난을 진압하게 하면 김덕령이 어찌 버티겠습니까."

"한명련이라면 그들을 반드시 소탕할 것입니다."


 권율의 휘하에서 함께 고생하며 사지를 돌파해 온 전우 한명련과 김덕령은 서로에게 칼을 겨눌 뻔했지만 나라에 대한 충심으로 일어섰던 의병장들은 스스로 관아로 들어가 관군의 오라를 받았다.


 왜란이 진정되고 휴전이 지속되자 의병들의 입지는 좁아졌고 조정에서는 그 힘을 두려워했다. 이 기회에 이름 높은 의병장들을 붙잡아 모두 반란죄로 투옥하였다. 


 곽재우는 겨우 풀려났지만 여러 의병장들은 고초를 겪어야 했고 악랄한 왜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맹장 김덕령은 악독한 고문을 견디다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의로운 이들의 죽음은 백성을 분노로 들끓게 하였고 선조는 더욱 의병장들을 압박했으며 이순신과 같이 공훈이 뛰어나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관군의 장수들 역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도 선조는 유독 한명련에 대한 총애를 보였다.

그를 불러 직접 청람삼승포 2 필을 하사했고 수시로 양피로 만든 옷을 만들어 주었다.


 정유년 때 권율의 휘하로 돌아온 한명련이 공주, 회덕에서 왜적과 싸움이 있었다. 그는 역시나 선봉세 서서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수많은 적병을 닥치는 대로 참살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자잘한 자상을 입어 그 부상 경위가 선조에게 보고되었다.


"명련의 상처가 가볍지 않으니 용렬한 의사로 치료하게 할 수없다. 급히 내의를 보내 명을 간호하고 온 마음을 써서 구제하도록 하라."


 선조는 천민 출신인 한명련이 동인과 서인 등 정치 세력에 구애받지 않는 올곧은 성품을 갖고 있는 걸 알았기에 출중한 무예 실력을 갖춘 그를 완전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진심을 다해 품으려 했다.


 왜란이 종결된 후 한명련은 종 2품 오위장이 되었고 여전히 선조의 총애를 지나칠 정도로 받게 되었다.

그러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 세력에 집중 견제를 당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천민 신분을 꼬투리 잡아 연일 상소를 올려대니 이를 견디지 못한 한명련은 자진하여 변방으로 떠났다.


 선조는 끝내 맹장 한명련은 품지 못하고 대신들의 뜻에 따라 떠나보냈지만 오히려 변방으로 떠나게 한 원흉인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 한명련을 잊지 못하였다.


 선조가 죽고 왕이 된 광해군은 더 이상 북인의 견제가 필요 없는 한명련은 한성으로 불러들였다.


"한명련과 같은 역전의 장사는 기복 시켜 올라오게 하시오."


 복귀한 한명련은 광해군의 칼이 되어 길주 목사를 거쳐 순변사의 자리에 올라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인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위기를 느낀 한명련은 사직을 요청하며 귀향하기를 바랐지만 인조는 그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명련은 역모 혐의로 체포되어 압송되어 오던 중 북방을 수호하는 용장 이괄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괄은 인조를 즉위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활약에 상응하지 못하는 대접을 받았고 그의 아들이 역모죄로 몰리게 되어 그의 입지가 매우 좁아진 상태였다.


 그렇게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게 되어 맹장 한명련이 이괄의 선봉으로 활약하며 북방에서부터 수도 한성까지 점령하면 기염을 토했지만 같은 천민 출신의 지용을 겸비한 정충신에게 패배하였다. 이괄과 함께 퇴각하던 한명련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함께 목이 베어졌다.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이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처형당했으며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 형제는 후금에 투항하여 청나라의 장수가 된 후 조선 침략의 길잡이가 되었다.


 훗날 병자호란이 일어나 국운이 꺾이려 할 때 인조가 이 남한산성을 구하기 위해 적진을 휘저을 용맹한 장수가 없음을 한탄하자 신하 이경증이 말했다.


"한명련 같은 자가 있다면 적진을 돌파하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지금 그 일을 담당할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들어보지 못하였나이다."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조선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명장 마귀는 이순신, 권율, 정기룡과 함께 한명련은 조선의 양장으로 손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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