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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나 Apr 23. 2021

너니까 하기 시작한 것


1.


작가 공지영이

<딸에게 주는 레시피>에서 말했다.


칼을 쥐어주면 잘 자라고 이불 덮어주는 너와
인형 쥐어주면 화가 날 때 무기로 사용하는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유전자를 우습게 봤는지 느꼈다.







나도 매일 느낀다.


내 거랑 너무 다른

너의 유전자!




2.

평소에

싸움이라고는 말싸움도, 기싸움도, 눈싸움(eye battle)마저 슬금슬금 피하는 나인데

우리 집 작은 남자는

기승전 결투! 다.

 

전집이 몇십 권이 있어도

이런 것만 읽어내라고 가져온다.




왜?


싸우는 거니까!



"엄마 놀아줘~" 하면서

자동차 경주를 하고 하고 또 하자 하고

공룡 싸움을 하고 하고 또 하자 하고

흐미.....


재미있는 건 밤을 새도 괜찮지만

재미없는 건 또 무쟈게 못 참겠는 나는


한.숨.이..


뭐 끝이 있어야지.

결투에....




"엄마~ 크앙~크앙~

이렇게 말도 해야지~


엄마~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 거야~"


중간중간  참여도까지 점검한다.


소꿉놀이도 결국 요리 시합으로.


그림자놀이도 결국

그림자 결투로.


연필깎이를 처음 보여줘도

연필과 연필깎이의 결투로.

(결과적으로 무고한 연필심의 대량살상ㅠㅠ

나 쓰레기 제로를 지향하는 지구인인데..)


니 욕구도 중하지만

평화주의자인 내 욕구도 중하다! 하며

다소 평화로울 거라 예상한

그림 그리기 를 제안했더니


"그래!" 흔쾌히 수락하는 게 이상하긴 했다.



그런데 결국

또 그려달라는 소재는 '세균과 충치'



자기는 정의의 사도!

무찌른다 얍!!! 얍!!


"엄마~~ 도망가는 소리 내야지잉~!!

엄마 또 그려봐~ 또! 또! 더 마안이!

세균 100마리 그려줘~

공겨억~~~~~~!!!!"



흥분해서 침까지 줄줄 흘리며  충치와 세균을 박멸한다.

테이프묶고 난리다.






덕분에 인생 최초로

한 시간 동안

세균과 충치를 그려냈.




3.

몇 년 전부터 어린이날이 다가오면

보육원에 선물을 보낸다.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5만 원 이내의 받고 싶은 선물을 아이들이 써내면,

후원자들이 맡아 선물을 보내주는 식이다.


 

보육원에는 남자아이가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입양할 때 여아를 선호한단다.

남자아이가 들어오면

상속문제나 여러 집안 문제가 복잡해질 것을 미리 걱정해서라나.



쳇...

두 번 버려지는 것 같아

마음이 심히 안 좋다.



어쨌든 이번에 나에게 할당된 선물은

건담이다.




또 결투냐?
또 싸움이냐?



한 번도 사본적 없고

앞으로도 금할 것 같지 않은 건담 피규어 려고

한참 동안 쇼핑몰을 뒤진다.


제일 빨리 도착하는 걸로 해외배송을 시켰다.


오늘 도착한 실물을 보니

역시나 나에게는 그저 검은 덩어리일 뿐.

이런 걸 왜 돈 주고.... 쩜쩜쩜...



선물보낼 피규어


우리 집 작은 남자가 보면

백 프로 울며 불며 사유화를 노릴 거라

이 검은 덩어리를 옷장 구석에 소중히 숨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사랑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이구나



오직 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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