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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나 Jun 11. 2021

아무것도 할수 없어 겁나 좋은 밤

1.



퇴근길 집에 다 왔는데

핸드폰이 없다!




아...

마지막 수업 시간에 가져갔었는데

그 가방에 두고 왔구나!



1초간 당황스럽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히 뭉근하게 점점 더 좋아진다.








핸드폰이 없으니


온라인으로 장을 보려 했었는데

->볼 수 없다.

(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장바구니에 담고 결재하고 최소 20분은 걸린다.)




하루 내 왔던 카톡 문자와 단체 창의 대화들을 '예의상' 둘러보고 답글을 달아볼까 했는데

-> 할 수 없다.



다음 주 진로수업에 쓸 유튜브 동영상이 있나 짬이 나면 검색해보려 했는데

-> 할 수 없다.



마음이 동하고 체력이 허하면

브런치에 글을 써볼까 했는데

-> 할 수 없다.



올케 생일이었는데 까먹어버려서, 선물을 골라서 보낼까 했는데

-> 할 수 없다.



'이모~ 고마워요!! 맛있게 잘 먹을게요!'

답장하려 했는데

-> 할 수 없다.



'아빠. 이모가 냉동고등어를 같이 먹으라고 택배 보냈어요. 내일 나눠드릴게요" 답장하려 했는데

-> 할 수 없다.




시어머님께서 나에게

'준이가 눈이 아프다고 울며 갔는데 괜찮냐?'

'김치찌개가 식으면 꼭 냉장고에 넣어라'

라고 전화하려 했는데

-> 할 수 없다.

(대신 남편 폰에 불이 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겁나 좋은 밤.








2.

이날 밤 나는 언제 느껴봤는지도 기억 안 나는

'고즈넉한 고립감'을 느꼈다.


마치 오지로 해외여행 온 것처럼.


모든 것이 차단된 느낌이 무척이나 좋았다.




아이를 재우고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서

아무 하도고 연락할 수 없어서

너무나 만족스러운 밤.


아... 이래야 하는구나.


좋은 것도

겪어본 사람만 안다고,


내 퇴근 후는

사실 이래야 하는 거였구나.


아이와 눈 마주치고,

같이 사는 가족과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고,

가장 마지막으로는

나랑 만나는 시간을 고요 속에 누리는 것.




평소에 나는

얼마나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했나. 

스르륵 잠이 들 때까지도 계속되는 '할 일 목록'에 꽤나 지쳐있었나 보다.


식탁에 널브러져 있는 책을 아무거나 들어 읽는데

저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업무담당자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일부러 오전에는 학교 업무 메시지에 의도적으로 로그인을 하지 않는다.
대신,
오전에는 오롯이 음악을 들으며 수업을 준비하며
나 자신과 만난다.




나도 내일 오전에 그래 보렵니다!


저자에게 싱겁게 말을 건넨다.






3.

오늘 아침 전화기를 찾으러 출근을 해보니

뭔가 난잡하게 와있다.



그런데,

12시간 후에 봐서 큰일이 난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하루에 12시간 정도는 핸드폰 없어도

아~무 일 없는 것이다.




아니지.

아니지!


엄청난 일이 있었다.



퇴근과 함께 전화기도 빠빠 이하니

어젯밤 나는 책을 반권이나 읽고

오랜만에 가만히 앉아

내 마음과 만났다.


진짜로 '혼자' '쉼' 안에 머물렀다.



오늘도 퇴근하며

12시간 동안 핸드폰을 끊어볼까. 한다.


12시간 정도는 내 삶에 없어도 될 것들이

핸드폰 안에 가득하다.


-너투브

-초록창

-까톡

- 오아 O스, 마켓 O리 7000원, 5000원 할인 문자

- 12시간 답변 딜레이 정도로 우정이 금이 갈 것 같지 않은 친구들, 가족들

-오늘 안사면 안될 것 같'았'던 쇼핑 목록

- 어제한 얘기 오늘 또 하고, 내일도 또할 뉴스창

.......... and more



여행은
어딘가를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직장에 핸드폰을 놓고 오는 게 아닐까.


더 나은 삶은
뭘 더 하는 게 아니라
내 삶에 없어도 될 것들을
알아채는 게 아닐까.




산책길 초록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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