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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나 Mar 12. 2021

지는 꽃 감상

1.
생화는 다 좋은데 버릴 때가 문제다.

바스러지고 쪼그라든 꽃잎.
불어 터지고 썩고 냄새나는 아랫도리.

며칠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내 돈 내산 한 것을
쓰레기통에 처넣을라치면

'아... 생화는 이래서 별로야'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2.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지는 꽃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감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자.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라'
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꽃이 가장 예쁠 때만 '예쁘다 예쁘다'하는 건
상대의 최고의 순간만 함께하는 것이다.


그 꽃이 하루가 다르게 사그라지는 것을 함께하는 것은
그 꽃에 대한 진정한 수용이자 인정이고
그래서 더 깊은 사랑이다.


이 아이의 정점의 아름다움의 기억하는 나는
이 아이의 최고의 추함을 볼 때
더 깊은 친밀함과 연결을 느낀다.

같은 꽃





3.
늙고 병드는 게 벌써부터 두렵다.

암에 걸려서 항암만 죽도록 하다
결국 죽게 되는 게 두렵고
알츠하이머나 치매에 걸려
오래 서서히 죽어가는 것도 두렵다.


심장마비도 두렵고 사고사도 그렇다.

70대까지도 우쿨렐레 등의 악기를 배우며
공동체를 종횡무진하던 지인의 친정엄마는
한동안 나에게 노후에 대해 큰 희망을 주시더니.

80대가 되어서는
어깨가 망가져 밥을 무릎에 놔야 먹을 수 있고
허리가 완전히 고장 나 회생불가 판정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넘어져서 손목까지 아스라 지셨다.

이쯤 되니 심리적으로
절망에 허덕이는 어린애가 되셨단다.

병과 죽음에 대한
막연하지만 강렬한 불안.


해독제로
최근 내가 찾은 것이 있다.

바로
지는 꽃을 똑바로 보는 것.

지는 꽃을 보고 있자면
이 모든 과정이 즐겁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것임을.

피하고 싶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나만큼은 다를 것 같지만
나 역시 만물의 티끌 같은 존재임을
겸허히 수용하게 된다.


엄마가 병에 걸려 사망하는 전 과정을 보았다.
코앞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마지막 2주 정도의 24시간을 목격한 후로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깊이 생각한다.


삶이 우울하지 않냐고?

천만에.




죽음에 대한 묵상이 깊어질수록  
삶이 가볍고
아름답고
찬란하다.


즐겁고

유쾌하고

명료하다.

짧은 인생. 매일의 일상이 너무나 소중하다.

아이랑 마주 보고 찡긋 웃는 그 2초가 소중하고
남편이랑 마주하여 먹는 밥 한 끼가 귀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의 영상통화가 애잔하고
지나가는 계절 하나하나가 애틋하다.


삶에 대해 질척거리는 집착 말고
비싸고 좋은 포스트잇처럼 살고 싶다.


요긴하게 쓰이고 의미 있게 살다가
깔끔하고 기분 좋게.

흔적도 없이 떨어지고 싶다.


이게 나의 '죽음에 대한 소망'이다.


 


코로나 속 두번째 봄. 와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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