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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2013)

_ 삶. 날 것의 바다에 표류하다.

by 안녕스폰지밥

얼마 전. 가슴이 조금 먹먹했다.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빛이, 내 삶으로 마구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내 영혼을 나눠 담을 누군가와의 만남은.

그 순간부터가 고민이다.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이 물음으로 가슴속을 가득 채우는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의 타인을 만나면서, 또 하나의 나와 만난다.

어쩌면 마음속에 있는 각 방의 문을 열고 하나하나의 나와 좀 더 허물없이 만나기 위해 시작되는 이 시간이

사람이 신과 조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아닐까.

그렇게 '파이'는 '러처드 파커'와 만나고.. 떠나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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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의 아버지는 동물원을 운영하신다. 힌두교도이면서 크리스천이기도 한 다누이 신의 추종자 파이는,

세상 만물에서 영혼을 읽고 그들과 조우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게 살코기를 직접 손에 들고 먹이려 할 때에도

파이에겐 짐승이 아닌, 영혼이 담긴 친구에 가까웠다.

그런 그를 호되게 혼내기 위해, 아버지는 리처드 파커가 잔인하게 영양을 물어, 먹이로 끌고 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는 친구가 아니라 짐승이다.

호랑이의 눈에 담긴 건 영혼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 비친 거란다.'


아버지는 똑똑히 알려 주고 싶어 하셨고, 덕분에 현실에서의 생명은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영혼을 나누는 존재 중 하나의 소멸, 바로 죽음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리처드 파커와 파이. 긴장. 돌봄. 무엇보다 '희망'.

파이(∏).

영화 속의 파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신의 영역의 무한함으로 연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상징이다.

우주를 담고 살아가는 하나, 하나의 인간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리처드 파커는 사람의 이름을 가짐으로써, 삶이 가진 모순이라는 양날의 칼을 갈고 진리의 빛에 다가가게 끔 하는 존재가 되었다.

파이의 아버지가 알려 주신 대로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짐승의 모습을 하고서,

한편으로는 그의 영혼의 방을 드나들며 파이가 믿는 여러 신과 조우하도록 돕는다.

그렇게 리처드 파커는 그의 생명을 보호하는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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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가져가신 후.. 가장 중요한 '하나'로 돌아오다.

신은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절망과 빛나는 희망을 함께 주실 수 있다.

그것은 그 분만의 능력이다.

그림자의 존재는 빛이 가까이 있음을 더 확연히 보여 주듯이.

파이에게 순간순간 닥치는 죽음의 공포는 삶의 의미(지)와 가치를 한 꺼풀 더 벗겨낸 날 것의 상태로 일깨워 준다.

신이 그에게 원하는 건 죽음이 아니라, 죽음 같은 현실 속의 '희망'이었다.

파이는 망망대해 구명보트 안의 리처드 파커와 단 둘만이 남게 되면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다양한 모순적 진리를, 세 가지의 이미지들로 경험하게 된다.


나를 죽게 하면서 또한 살게 하는 바다의 거대함과 그 안의 생명체들.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한 극한의 공포이면서도, 돌봄을 통해 살아 있음의 의미를 가늠하게 하는 리처드 파커.

그리고 ∏, 수학기호 그 자신.


함축된 공간 안에서 그는 자신 안의 모든 신과 조우하고 화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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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여,

저에게 더 무얼 바라십니까.

저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걸 잃었어요.

제게 대체 무얼 더 바라십니까..'


가지 마, 리처드 파커..

바다의 사나움을 목도하고 그것에 대항하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파이는 살아남아 멕시코 해안에 표류하여 일련의 삶이 주는 고통의 과정이 끝난 후 통곡한다.

이 것이 카르마이며, 내려놓음인 것일까.

보내고 비운 후, 다시 채우기 위해.

299일 동안 파이를 긴장하게 하고, 돌보게 하며, 숨 쉬는 의미가 되어 준 리처드 파커를 밀림으로 보낸다.

성숙과 깨달음을 위한 하나의 과정을 보낸 파이는, 살아가며 다시 숨 쉬며..

또 다른 인생의 밀림에 던져질 것이다.


절박한 상황이 끝간 데 없을 때,

우리는 다시 타고 올라 설 희망의 끝자락을 찾는다.

이 원인 불명의 삶이 조금이라도 의미 있어야만,

부조리한 나의 불행은 '역사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채워질 수 있고,

그래야만 덜 억울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목놓아 울며 리처드 파커를 부르던 파이의 마음은,

타당성 없이 자신에게 밀어닥친 고통을 의미도 묻지 않고 깨끗이 떠나보내야 한다는..

삶의 진실에서 오는 허탈감의 반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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