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래비티(Gravity.2013)

- 환멸과 환희로 가득한 생(生)의 무게.

by 안녕스폰지밥

고요함.

아무도 없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우주.

Gravity_screenShot_01.PNG?type=w773

우주정거장의 시스템 관리 임무를 수행 중인 루이스는, 이 고요함을 통해 지구 안에서 겪은 고통을 제삼자가 되어 바라본다. 마치 저 파란 행성을 벗어나기만 하면, 우주란 공간이 주는 무음, 무취, 무압 상태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듯이.


Gravity_screenShot_03.PNG?type=w773

그러나 그 고요함은 잠시였다.

러시아가 자국 위성을 파괴하기 위해 쏜 미사일에 맞아 폭발한 위성의 잔해가, 다른 위성들까지 폭발시키며 같은 고도에서 매우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한다.

무중력의 고요함은, 비극의 시작을 알리며 엄청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중력을 잃은 인간, 삶의 고통과 현실을 외면한 루이스는 우주밖에서 다시 고통스러운 상황과 마주한다.

그런 와중에, 다행히도 함께 생존한 임무 지휘관 맷 코왈스키는 끊임없이 그녀를 다독이며 생존의 길로 안내한다.

코왈스키는 본능적 생의 의지만 남은 채 두려움 속에서 버둥대기만 하던 루이스를 이끌어 준다.


Gravity_screenShot_10.PNG?type=w773

그런 그가, ISS(미국 우주정거장)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훼손된 우주선의 낙하선 줄에 의지한 루이스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던 장면은, 죽음 앞에 진실로 의연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닌, 선택과 결정에 있어 얼마나 주체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타적 행위로써의 '놓음'이 아닌, 최선을 위한 빠른 결정으로서의 '내려놓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Gravity_screenShot_14_a.PNG?type=w773

코왈스키를 잃고 힘겹게 도착한 우주 정거장에서는, 라이언을 '미치고 팔짝 뛰게 하는' 멘붕의 상황이 연속으로 이어지지만, 절망이 가득한 순간의 연속선상에서 다시 생의 의지를 끌어올리는 그녀를 확인하게 된다. 중국의 우주정거장으로 건너가 셴죠(탈출을 위한 우주선)를 타기 위해, ISS(미국 우주정거장)로부터 도킹 해제한 소유즈가 낙하산 줄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그녀는 결국 우주 밖으로 나와 줄을 끌어내려 시도한다.

위성의 2차 잔해 폭격을 앞두고도, 코왈스키가 주고 간 '대처를 위한 순간의 여유와 침착함'을 흡수하고 행동하는 라이언.


그녀는, 놀이터에서 넘어져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딸의 기억이 담긴 지구를 떠나, 끝없이 고요한 우주에서 평온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땅에 발을 딛일 수 있는 힘이 없는 공간 안의 공포를 통해 그것이 중력이든, 삶의 무게이든.. 존재 이유를 부르짖게 하는 모든 고통 속에 담긴 생의 환희를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영화 속에는 주인공과의 공감각의 경계를 풀고, 경험을 공유하는 연출이 인상적인 시퀀스들이 존재한다.

Gravity_screenShot_06_a.PNG?type=w773 우주복 헬멧 안 라이언의 긴박한 호흡을 공유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방향으로 시점을 돌려, 공포를 공유하고 느끼게 하는 장면.


Gravity_screenShot_06_b1.PNG?type=w773 연료가 떨어진 소유즈 우주선 안에서 죽음을 예감하는 라이언의 눈물이 렌즈에 맺혀 흘러내리는 장면.


Gravity_screenShot_06_c.PNG?type=w773 지구 착륙 후, 뭍으로 걸어 나오는 라이언의 발이 튀긴 흙탕물이 렌즈에 맺히는 장면.


영화는 또한 다시 태어남의 메시지를 시각화하며, 현재와 미래의 생을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Gravity_screenShot_17.PNG?type=w773 파과 된 위성 조각의 2차 공격에도 결국 소유즈에 탑승한 라이언. 우주복을 벗고, 산소를 들이마시며 산모의 배 속 태아의 모습으로 안정을 취하는 장면.


Gravity_screenShot_16.PNG?type=w773 지구에 착륙 후, 오랜 무중력 상태로 인해 쉽게 일어서지 못하고, 무거운 삶의 중력과 해후하며 남기는 라이언의 말. '고마워.'


위성 잔해의 3차 공격을 맞이하며 중국 우주정거장 톈공에서 분리된 우주선 셴죠는, 지구의 중력을 따라 라이언을 다시 삶으로 이끈다.

지구에 착륙하고, 다시 태어나듯 대지를 밟고 일어서는 라이언.

삶의 무게가 주는 슬픔과 환희의 밀당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다.


땅에 발을 딛일 수 없어, 우주 잔해에 둘러 쌓인 채 위험한 순간에 여러 번 놓이게 되면서

우주의 고요함이 좋다던 그녀는, 무중력의 공포 한가운데에서 영원한 고요함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Gravity_screenShot_15.PNG?type=w773


'예감이 좋지 않아'


코왈스키와 라이언이 난관에 처할 때마다 했던 말이다.

우리는 결국 좋지 않은 예감과 함께 꾸준히..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예감은 좋지 않아도, 계속 말해야 한다.

코왈스키의 말처럼, '누군가 듣고 있으면 살 수 있으니까.'


인간 존재의 일상적 허무가 삶의 무거움이라는 강력한 존귀의 힘을 만났을 때.

다시 발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 '그래비티'를 체험하게 해주는 영화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