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와 금동이.
금동이에게 습식에 건사료를 섞어 배불리 먹이고
브러시로 죽은 털을 정성껏 쓸어 주었다.
닝겐의 그루밍에 골골송을 부르며, 눈을 스르르 감고 배를 뒤집는 너란 고양이.
방학에 주말까지 되면, 영역을 지나치는 아이들의 발길이 줄어들어
예쁨 받는 시간이 적어진 금동이는,
일주일에 한두 번 밖에 보지 못하게 된 나를 애틋하게 반긴다.
그런 금동이를 바라보며, 자연스레 강지를 떠올린다.
16년을 가득 채워 내 곁에 있던 누렁이.
강지를 처음 만난 날의 나는, 스물네 살의 취준생이었다.
3개월이 조금 넘은 3kg의 잉글리시 코커스페니얼이 오빠의 품에 안긴 채, 우리 가족과 조우했다.
누구의 허락이 필요했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생명체의 입주였다.
새벽, 낯선 집에서 잠을 설치며 낑낑대던 꼬마 강아지를
거실에서 품에 안고 있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똥처럼 몸을 말고 아빠 다리 속으로 파고들어 찰싹 붙어 있던 강지의 모습도.
다음날, 취업 포트폴리오를 만들려고 컴퓨터 학원 창가에 앉아 있던 나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만큼이나 우울했던 내 앞날, 앞쪽 스크랩에
어린 강지의 모습을 끼워 넣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던 쌀쌀한 늦겨울의 하늘에는 강지 모습이 아른거리고.
학원 창가로 스멀스멀 올라오던 상가 1층 식당의 소고기 뭇국 냄새에서
3개월 된 내 강아지의 풋내 어린 누렁 내를 떠올렸다.
그때, 우리도 강지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강아지와 삶의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
한 생명의 시간을 처음에서 끝까지 책임과 의무로 감싼다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의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 경험하게 되는 환희와 절망까지.
금동이는 오늘도, 길지 않은 묘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내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저녁 6시 40분 즈음, 두 발을 모으고 동상처럼 앉아서
조용히 우리가 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너의 모습.
덩치보다 훨씬 작고 귀여운 젤리 발을 내어 줄 준비를 하고
백 미터 거리에서도 간식 가방의 실루엣을 기억하고 웅냥거리며 다가오는 너.
한참을 쓰다듬어야 만족하는 금동이를 두고 돌아서야 할 때는
엄마를 먼저 보내고
엄마가 걸어가는 쪽을 바라보는 금동이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내일의 만남, 아니 내일이 불가능해지면 다음 주를 기약하며..
금동이 귀에 대고.. 건강하라고.
제발.. 나쁜 사람들을 피해 다니라고 말해 준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일어설 때마다
귀엽고 짧은 웅냥 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앞발로 바닥에 박박 스크래치를 낸다.
한참을 걸어온 후, 돌아보면..
예전보다 서로에게 진중해진 이별 인사의 과정을 이해해 준 금동이가
거기, 그 자리에서 처음 우리를 기다리던 그 자세로 바라보고 있다.
찬바람이 불기 전에, 인정해야 할 것 같아.
너와 우리가 인간이 만든 책임과 의무의 영역에 묶여
사랑으로 삶을 공유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