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 사회에 소개되어지는 개신교의 모습이 날로 극단적으로 비춰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단순 명료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겠지만, 뒤틀린 종교성의 원인과 출구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특별히 오늘 한국 개신교가 국가적 혼란을 야기하는 진원지가 된 원인에
대해 단순히 신학적 고찰에 멈춰서는 분명한 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사태에 대한 사회적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요즘이다.
특히 한국 개신교가 친일에서 친미로, 반공에서 반동성애로 이어지는 이념적 신앙화가
이뤄질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교회가 정치 권력과의 유착관계를 통해 성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일제 시대 친일을 했던 목회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대형 교회를 만드는가 하면,
군부 시대에는 독재자들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목회자들의 교회 성장이 눈에 띈다.
역사적 사건들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겠지만, 정교유착을 통해 한국 개신교가 역사적
오점을 남겼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여전히 그런 모습을 답습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왜 오늘 한국 개신교는 여전히 사회적 권력을 비판하고, 저항하기 보단 기생하려고
하는 것일까? 과거의 만행을 반성하고, 참 된 회개가 사라진 한국 개신교는 앞으로
개혁 될 수 있을까? 한국 개신교의 이러한 병폐가 이어지는 원인과 출구를 찾기 위해
독일의 사례를 잠시 살펴보고 싶다.
과거 히틀러와 나치의 파시즘의 지배를 받던 독일은 어떻게 '새로운 독일'이 되었을까?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었더라도 독일에 드리워진 독재의 그늘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주 헌재의 선고가 이뤄지지 않고, 내란의 주범들이 여전히 정부 주요 요직에서 활동하는 것을
본다면, 독재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것일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독일은
나치 체제하에 저질렀던 만행을 청산하기 위해 고된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독일은 '과거 청산'을 위해 과감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유럽에서 시작되었던 68혁명 이후 독일에도 모든 영역의 개혁과 변화가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1968년 11월 6일 집권당이었던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Kurt Georg
Kiesinger)가 연설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젊었을 때 나치당원이었다. 다시말해
1968년까지 여전히 나치에 대한 과거 청산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키징거의 연설 중 한 여성이 갑자기 단상에 뛰어올라 키징거 총리의 뺨을 때렸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나치는 꺼져"라고 외쳤다. 이 여성은 베아테 클라스펠트(Beate KlarsFeld)라는
29세의 젊은 여성 언론인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독일에서 일어난 68혁명의 상징적 사건이다.
이처럼 독일은 과거 청산을 위해 과감하고, 급진적인 시도들을 했다. 특히 교육에서 학교 역사
시간의 절반을 히틀러 시대, 나치 시대에 할애한다. 인류에게 재앙을 몰고왔던 자신들의 역사를
반성하고 비판하여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혹자는 이런 교육을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Erziehungnach Auschwitz)'라고 부른다. 독일은 '더 이상 아우슈비츠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목표를 설정한 교육을 시행했다. 이것이 독일이 새로운 독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다시 한국 개신교로 돌아오자.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왜 여전히 과거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일까?
아니 왜 시간이 지나도 점점 더 짙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나는 이를 사회적으로는 '과거 청산'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고,
신앙적으로는 '진정한 회개'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을 영웅화한 영화, KBS에서 방영하여 논란이 됨.)
한국 개신교의 역사 교육을 살펴보면 놀랍다.
식민지 근대화론, 이승만 정권과 독재 정권 찬양, 민주화 운동의 악마화 등
대한민국의 올바른 역사관과 전면으로 배치되는 역사 교육이 한국 개신교에 이뤄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한국 개신교는 진정 변화와 개혁이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에 진정 필요한 것은 진정한 회개, 곧 과거 청산이다.
한국 교회가 지난 잘못들을 스스로 반성하고, 변화를 위해 애쓰지 않은채로 시간이 지난다면,
결국 교회는 한국 사회가 청산해야할 대상이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스라엘에게 전해진 좋은 소식,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해 먼저 소리를 외쳤던
선지자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다.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는 몸에 물을 적시는 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그저 종교적 행위를 영위하는 것을 '회개'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들이 걸어온 삶을 돌아보고, 살아오던 삶의 방식을 바꿔 새로운 길로 돌아서는 것이요.
그것이 세례 요한이 전한 회개의 세례의 참 본질이었다.
7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8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9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눅3:7~9)
오늘 한국 교회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러한 회개 아니겠는가?
기꺼이, 결연히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돌아서는 교회들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새로운 날들이 오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