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아빠가 되기 위한 여정
육아를 하며 내가 가장 크게 후회하고 반성했던 것은 내가 아이를 놀아준다고 착각했다는 점이다.
‘놀아준다’
이는 보호자가 아동에 대해 시혜자 입장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내가 너와 놀아주는 것’이라는 수직적 관계가 성립되다 보니 아이와의 놀이를 자칫 유치하고 지루한 것으로 치부하기가 쉬웠다. 같이 놀자고 조르는 아이의 성화에 끌려 곁에 앉아 있긴 하지만 내 눈은 핸드폰을 향할 때가 있었고, 머리는 야식 메뉴에 있으며 마음은 자고 싶다는 생각에 고여 있곤 한다.
‘같이 논다’
이 말은 보호자와 아이가 같은 눈높이에서 대등한 주체로서 주어진 상황과 놀이에 몰입한다는 개념에 가깝다. 생각해보자. 친구들과 축구, 게임을 하거나 퇴근 후 잘 통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을 함께하거나 차를 마시는 등의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라는 것은 그 자체로 풍성한 의미를 지닌다. 수많은 ‘함께 놂의 총합’이 이룩한 유대관계의 얼개는 어지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스스로 거룩한 시혜자라 생각하며 아이를 놀아주던 시절의 나는 매일 피로하고 지쳐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로 얻은 것은 무엇이냐, ‘나는 꽤 괜찮은 아빠야’라는 값싼 우월의식과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참 멋진 아빠인데 왜 점점 힘들어질까? 아닌가 멋진 아빠는 원래 힘든 것인가?라는 물음이 꼬리를 이었다.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다 싶었다. 아이를 재운 뒤 아내와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반성한 끝에 도출한 결과는 의외로 심플했다. 그것은 바로 그냥 ‘같이 놀자’였다. 말이 참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같이 논다고 생각을 하니 뭔가 신나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 단짝 친구와 개구진 꿍꿍이를 가지고 어른들 몰래 무엇인가를 작당 모의하는 듯한 일말의 짜릿함도 느껴지더라.
아침 6시에 눈을 떠서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과를 매듭짓고 나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곤 했었다. ‘아 나는 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또 출근을 하는구나’라는 기분이 한숨의 발원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패러다임의 전환 이후의 삶은 ‘오늘 퇴근 후 같이 뭘 하고 놀면 좋을까’를 고민하는 설렘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매일 무슨 대단한 놀이를 했던 것도 아니다. 놀이 자체가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다. 함께하는 사람이 아빠니까, 부모니까, 아이는 그것만으로 충분하게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니 바쁜 일과를 쪼개어 과제하듯 고민할 필요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본인의 어릴 적을 떠올리면서, 주말에 아빠랑 같이 하고 싶었던 놀이들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
내가 아이에게 ‘놀아주는 사람’이 된다면 아마 아이는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안고 자랄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관계는 10여 년 뒤쯤 역전될 것이다.
어느 순간 아이는 장성하여 귀가하자마자 본인의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 부모와의 대화도 없이 고독을 씹는 사춘기 소년, 소녀가 될 수도 있다. 그때가 되어서야 아이에게 말을 걸고 아이에게 친하고자 하면 이미 늦지 않을까? 아이 입장에서는 ‘아니 왜 대체 갑자기 친한 척이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빠는 아빠대로 ‘쟤는 대체 왜 저렇게 버릇도 없고 아빠랑 대화도 안 하는 거야?’라는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춘기 아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멋진 아빠’라는 욕구를 끝내 충족하지 못한 쓸쓸한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솔직히 아이와 노는 시간을 제외하고 중장년의 어른들이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기가 쉬운가? 또한 아이들은 모두 천재의 그릇을 가지고 있어서 가끔 놀라운 창의력으로 어른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른이 규칙과 틀에 긴박된 존재라면 아이는 놀이의 틀 밖에서 놀이를 바라보는 초월자이다. 그들이 던지는 기발한 말들로부터 배우고 감동받는 시간은 너무도 귀하다.
육아와 놀이의 과정에서 힘들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으며 지칠 수도 있다. 솔직히 나도 매일 내면의 사리가 쌓이는 기분이니까. 그래도 뭐 완벽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빠도 사람인데! 그럴 때는 스스로를 보듬어 주면서 차분하게 놀아보자.
중요한 것은 ‘놀이’에 접근하는 방향성 자체이니까. 방향타만 잘 잡고 있다면 흔들림은 있어도 좌초는 없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을 가득 담은 만선은 반드시 행복이라는 항구에 도착하리라.
힘이 들 때면 아이가 태어나던 날을 떠올려 본다.
온 밤을 무겁게 짓누르며 아내의 그믐달 같은 눈썹을 내내 떨리게 만들던 산고(産苦)를, 그저 아내의 허리를 쓸어주고 같이 힘들어하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폭우처럼 내리치던 새벽녘을, 그리고 기어코 울리던 아이의 울음소리를
분만장의 차가운 수술 도구들 따위는 모두 녹여버릴 것만 같던 그 용광로 같은 최초의 울음 앞에서 맹세하던 ‘좋은 아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첫 발걸음은 놀이에서 시작한다고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