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기적
전자레인지가 고장 났다.
정확하게는 ‘광파오븐 레인지’라 불리는 이 기계는 전자레인지의 기능과 오븐의 기능을 겸하는 것이다.
결혼 직후 고교 동창으로부터 선물 받은 이 광파오븐 레인지는, 선물해준 친구를 닮았다.
비행기 조종사인 친구는 키가 190cm에 달하는 거구이다. 그는 체구에서 느껴지는 풍모와는 달리 순수하고 선한 성품을 지녔으며 한편으로는 체구와 어울리게 우직한 면모도 지녔다.
직육면체 모양의 육중하고 투박하게 생긴 광파오븐 레인지 역시 우리 집 뒷 베란다에 놓인 세간 중 가장 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것은 지난 5년 간 묵묵하게 우리 집 식탁에 놓인 다양한 요리를 책임져 주었다.
최근 들어 광파오븐 레인지가 해낸 주된 역할은 밥을 데우는 일이었다.
전기밥솥의 보온 기능은 참 편리하지만 가정 내에서 소비하는 전력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전기세를 아끼고 환경에 조금이라도 덜 부담을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밥을 지어먹은 후 남은 밥은 보온하지 않고 락앤락 통에 적당량씩 덜어 식히고 냉동 보관을 하였다.
끼니때가 되면 냉동된 밥이 담긴 락앤락 뚜껑을 열고 실리콘 덮개를 덮어 레인지에 3분 30초가량을 돌렸다.
음악 하나를 듣는 정도의 시간만에 냉동된 밥을 갓 지은 밥처럼 부활시키는 기계는 흡사 마술 도구 같았다.
사용한 지 2,3년쯤 되었을 때 잔고장이 나서 수리한 후 문제없이 잘 사용하다가 근래 들어서 ‘Er6’, ‘Er7’ 등의 에러코드가 가끔 나곤 했다.
잠시 두었다가 사용하면 다시 잘 되길래 ‘그냥 별 문제 아니겠지’ 하며 치과 진료를 미루고 미루는 사람처럼,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사용하곤 했다.
주말 오전, 아이와 빵, 우유, 달걀 요리로 요기를 한 후 아이가 주말에 꼭 하자고 벼르던 미술 놀이를 함께 하였다.
둘째를 임신하여 평소보다 잠이는 아내는 10시쯤 일어났다.
데칼코마니, 점선 잇기, 종이테이프를 활용한 색칠놀이 등에 몰입하느라 본인의 기상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부자를 보며 아내는 부스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곤 냉장고를 열어 잠시 재료들을 응시하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머리끈으로 머리를 질끈 묶고 채소들을 우두두 꺼내어 카레와 채소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음식이 거의 준비되었을 무렵
아침 일찍부터 고생했다며, 좀 쉬라면서 아내는 나를 안방으로 밀어 넣었다.
어제 새로 교체한 이불에 벤 볕 내음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인지 금세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1시간쯤 뒤, 눈을 떠서 나가보니 아내가 아이에게 잔치국수를 먹이고 있었다.
내가 ‘분명 카레와 채소전을 만들었는데 왜 밥이 아니라 국수를 삶았지?’하는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아내가 말했다.
“레인지가 이제 수명이 다 했나 봐. 에러코드가 몇 개 뜨더니 먹통이네요. 여러 번 시도했는데 안 되어서 그냥 꺼두었어요. 밥을 돌리려고 했는데 안되니까 국수 삶았어요. 새로 밥을 하면 좋은데 아들 식사 시간이 늦어질까 봐. 당신도 같이 먹자.”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문제가 생기더라도 상황에 고여서 짜증을 내지 않고 순발력 있게 다음을 이어갈 줄 아는 사람, 현명한 당신이 어련히 알아서 했으려고.
“며칠 전에도 그러다가 금방 괜찮아지더니.. 주중에 AS 요청 한 번 해볼게. 혹시 수리비가 10만 원 넘어가면 새로 사자. 요즘 더 좋은 스펙에 저렴한 것들도 많이 나왔대요. OO이가 선물해준 거 아주 잘 썼는데, 기계도 나이가 들면 어쩔 수가 없네요.”
덕분에 북어 대가리로 육수를 낸 맛난 잔치국수로 점심을 해결하고 저녁에 먹을 밥을 미리 안친 뒤 아내, 아이와 동네 산책에 나섰다.
그날 저녁, 몇 시간을 뛰노느라 노곤했던 아이는 일찍 잠에 들었다. 아내도 아이를 재우다가 함께 잠이 들었다.
고요한 시간과 공간은 다양한 생각이 요란스레 피어나게 만든다.
레인지가 고장 났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도 냉동밥을 활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내는 다음날 아침에 아이가 먹을 밥을 지어야 한다.
육아를 해본 사람들은 느끼겠지만 아침에 5세 남아를 챙기며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7시 전후로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는 내가 그 정신없는 아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밥솥에 밥을 안치는 것 정도밖에 없다.
아침은 늘 변수가 많다. 늦잠을 잘 수도 있고, 그날따라 머리 세팅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다음날 아침에 밥을 안치는 일정 하나를 삽입하기 위해서는 전날 밤에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진다.
우선 출근복을 골라서 미리 꺼내 두었다.
사용할 마스크를 미리 꺼내어 좋아하는 남색 마스크 스트랩에 연결한 후 걸어두었다.
오메가 3, 효모, 비타민 등의 영양제를 꺼내서 종지에 올린 후 덮어 두었다.
알람을 평소보다 10분 일찍 맞추었다.
가방을 미리 챙겨 두었다.
스테인리스 보울에 쌀을 씻어서 불려두었다.
일상에 밥 짓는 것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마음이 부산스럽다.
평범한 하루에서 기계 하나가 빠지고 할 일 하나가 얹어지자 이리도 챙길 것이 많아진다.
어떤 의미에서 일상은 기적의 다른 말이다.
다음날 새벽 6시 10분, 공성 무기에 실린 무거운 돌덩이가 성벽을 때리는 것 같은 알람에 눈을 번쩍 떴다.
물을 한껏 머금어 탱글 해진 쌀을 새집에 옮겨주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밥솥 옆에 우두커니 있는, 낡은 레인지를 괜히 한 번 툭툭 만져본 뒤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