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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두산 Apr 02. 2023

인생이란

알 수 없어서 더 흥미로운

    예전 나를 알던 사람이 지금의 나를 보면 놀랄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의 모습이 과거의 나와는 사뭇 달라서 그렇다. 겉모습도 물론 많이 변했지만 내가 하는 일의 성격에 더 의외의 면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진심으로 공부를 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꽤나 오랜 시간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고,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 없었다. 이 삶에서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 나름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 '자격'은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아마 누군가에게 그런 자격을 받아야 한다면 그런 자격을 줄 수 있는 건 ‘나’ 스스로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누군가와 경쟁하고 부대끼며 감정적인 부딪힘이 생기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스로는 욕심 없는 척, 경쟁을 하는 자체가 쓸데없는 짓이라는 식으로 넘겨 버리곤 했지만 사실 나는 욕심이 많고, 경쟁심도 강하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지는 것을 매우 참기 어려워한다. 그래,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그런 이유로 의식적으로 안될 것 같은 일, 사람들과 경쟁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매우 단순한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실패와 성공이라는 두 가지 관념, 한 번의 실패가 고정된다는 생각과 함께 경쟁은 반드시 지는 사람과 이기는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비교와 평가’가 항상 수반된다.


    이러한 틀에서의 경쟁은 언제나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나온다. 하지만 경쟁이 꼭 그런 모습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가 잘하는 것이 꼭 내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나의 성공이 다른 사람을 실패자로 만드는 일 역시 아니다.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의 구도는 오히려 개개인의 가능성과 역량을 펼칠 수 없는 환경을 만든다. 아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면 어떤 아이들은 초반에 배우는 속도가 빠르고 후반부에 느리다. 다른 아이들은 초반에는 느리지만 후반부에 빨라진다. 요는 결국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그들은 모두 배우고 익혀야 하는 내용을 시간 내에 훌륭하게 익힌다. 무엇이든 그렇다. 사람마다 강점이 다르다. 배움에 어려움을 느끼는 구간이 다르다. 중요한 건 결국은 모두 비슷한 시간 안에 잘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배움에도 유형이 나뉜다. 어떤 사람들은 ‘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대답이 나와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혹은 ‘어떻게’가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만약 ~이라면’ 이 해결돼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왜’가 중요한 사람인 것 같다. 왜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왜 아유르베다를 알아야 하는지, 왜 운동을 해야 하는지.. ‘왜’가 중요하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왜’ 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은 상태로는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왜 이게 이렇게 되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 특히 수학을 배우며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왜 그런지 누구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해서 일 수 있다. 지금은 그 시절의 어떤 느낌만이 기억으로 남아있다. 해결되지 않은 어느 지점이 있고, 어떤 대답을 들어도 그것이 시원하게 이해되지 않는 그런 느낌이다. 나는 아직도 수학을 잘 모른다. 지금에 와서 보건대, 나는 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이다.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생각의 전개를 진행해 나가는 방식이 꽤나 논리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을 도출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

 

    어려서는 질문을 잘 하지 못했다. 엉뚱한 질문을 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부분은 인도에 가서 어느 정도 극복이 됐다. 아유르베다를 새롭게 공부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바보 같은 질문일지라도 용인이 됐다. 나는 그런 상황을 꽤나 즐겼다. 그리고 발견한 부분은 바보 같은 질문이 사실은 제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근본적인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질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할 때마다 사실은 상대도 그 부분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사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좋은 공부가 될 수 있었다. 상대가 호의적으로 정성껏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준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답을 회피한다. 나도 나와 비슷한 친구가 비슷한 질문을 하면 설명을 하려고 애를 쓰며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마다 내 질문을 받았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피식 웃음이 난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내가 던진 수많은 바보 같은 질문들을 받아서 정성껏 생각하고 대답해 준 선생님과 동료들에게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갖고 있다. 아마 이제는 나도 그것을 갚아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정성껏 질문에 답해주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돕고 산다.


    인생이란 알 수 없다. 내 짧은 인생을 뒤돌아보면 쉽지만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내가 오늘 하루를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하나 찾아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한편으로 고통스럽지만 재미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나는 변해왔고, 지금도 계속 변하고 있다. 알 수 없는 인생이라 더 살아볼 만하다. 내일의, 한 달 뒤의, 일 년 뒤의, 십 년 뒤의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알 수 없어서 오늘도 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고통은 항상 따라오지만 군데군데 즐거움이 있고,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는 법도 조금씩 배워간다.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이번 생은 계속 그렇게 노력하며 살아가려 한다. 좀 더 많은 바보 같은 질문들을 발견하고 묻고 대답하며 그런 바보 같은 사람으로 즐겁게 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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