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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두산 Mar 31. 2023

나란 존재

어느 '나'가 진짜 나일까

    나란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규정짓는 ‘나’는 누구일까. 다양한 이름을 갖고 살아간다. 누군가의 아들로, 남자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청년으로, 이방인으로, 학생으로, 전문가로, 아마추어로, 내성적이고 예민한 사람으로, 성공하고, 실패한 사람으로, 왜소하고, 중간 정도의 키를 가진, 남다른 면이 있는, 꿈이 있는, 열정은 있으나 의지와 지속력이 약한, 고집이 세고, 고지식하고, 바르고, 비뚤어진 면이 있으며,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으로. 그 외에도 나를 규정지을 수 있는 표현은 많다. 내가 가진 다양한 면이 있고, 상황에 따라, 주변 사람들에 따라 내 안의 변화에 의해 나는 다른 면을 드러낸다. 어쩌면 내가 나를 어떠한 형태로, 특정 언어로 규정짓는 순간 그 틀 안에 맞춰지는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진짜 ‘나’도 있다. 그 어떤 형태나 언어로 규정지을 수 없는 ‘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정확히 규정지을 수 없지만, 그 존재를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런 ‘내’가 있다.


    생명(Ayu)은 몸-마음-감각기관-영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나를 규정할 수 있는 대부분은 몸-마음-감각기관에 국한된다. 키가 크고 작은, 몸이 왜소하고 건장한, 잘생기고 못생긴, 예민하고 둔한, 인내심이 강하고 약한, 내성적이고 외향적인, 어리거나 나이 든, 남자이고 여자인, 재미있거나 재미없는, 머리가 길거나 짧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람으로 나는 규정될 수 있다. 영혼(Atman)은 그중 어떤 표현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 영혼으로서의 나는 그저 존재하는 자이다. 어떤 다른 부연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 존재 자체로 부족함이 없다. 뜬금없고 종잡을 수 없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나 또한 정확히 모른다. 눈을 감고 내 몸을 없애고, 마음을 없애고, 감각을 차단한다. 그럼에도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상상할 수는 있다. 나는 그게 ‘나’라고 믿는다. 모든 게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런 존재.


건강한 사람의 건강을 지키고, 질병이 있는 사람을 치료한다


    아유르베다는 인도의 여러 사상과 철학을 받아들였다. 아유르베다의 목적, ‘건강한 사람의 건강을 지키고, 질병이 있는 사람을 치료한다’에 부합하는 한 폭넓게 수용하고 활용했다. 요가와 마찬가지로 아유르베다 또한 세상의 기원에 대한 상키야(Sankhya) 철학의 이론을 일부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아유르베다는 딱딱하거나 편협하거나 제한적이지 않다. 유연하며 열려있고 어느 한 나라, 장소, 문화 등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것이 사람을 위한 지식 만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유르베다(Ayurveda)라는 말은  아유(Ayu)와 베다(Veda)로 이루어진다. 아유(Ayu)는 삶/생명, 베다(Veda)는 지식/지혜를 의미한다. 즉, 아유르베다(Ayurveda)는 생명/삶의 지식/지혜를 담고 있다. 사람만이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생명이 있고 그들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위한 지식이자 지혜다. 실제로 많지는 않지만 동-식물을 위한 아유르베다 문헌이 존재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일부는 아직 남아있다.


    인도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면 돈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아르바이트를 한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기에 짧은 기간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자리를 찾는다. 그때마다 1순위에 오는 일은 삼촌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일용직으로 잠시 일하는 것이었다. 기술이 없어도 되고, 건강한 신체만 있으면 됐다. 지방이지만 삼촌이 머무는 곳에서 함께 지낼 수 있기에 머무는데 문제가 없다. 무엇보다 일당이 나쁘지 않다. 이미 인도에 공부하러 떠나기 전 5개월 정도 일을 해본 경험이 있기에 어떤 일을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인도로 떠나기 전의 나는 운동을 꾸준히 해와서 몸은 건장한 편이고 몸무게는 65-68킬로그램, 머리는 짧은 편이었다. 인도에서 몇 년을 생활하고 잠시 돌아온 나는 몸무게가 10킬로그램 정도 빠져 있었고, 운동도 별로 하지 않아서 근육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같은 사람이 맞는지 확인해봐야 할 정도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때 나는 머리를 길러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했지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매우 달랐다. 건장하고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던 나에게 사람들은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빼빼 마르고 긴 머리의 나에게는 무례하고 비아냥을 일삼았다. 내가 인식하는 ‘나’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식하는 ‘나’는 꽤나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사회에서 문화에서만 당연한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회, 문화,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될 수 있다. 프랑스, 러시아, 독일, 네팔, 스리랑카, 일본, 스위스, 네덜란드, 이란, 스페인, 이탈리아, 브라질 등 다양한 나라에서 아유르베다를 공부하기 위해 온 친구들과 교류하며 그런 지점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인도라는 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지역마다 특유의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문화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모든 면에서 눈에 띄게 다르다. 그렇기에 어떤 사실들이 이곳에서는 당연하지만 그곳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런 경험은 인식과 수용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주었다.


    인도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가 나이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순간은 서류를 작성할 때가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평소에는 내가 다른 사람의 나이를 물을 일, 누군가 내 나이를 물어볼 일이 거의 없다. 가끔 있기는 하지만 드문 일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나이를 모르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서로 이 정도 나이대일 것이다 하는 짐작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야기하는 방식이나 생각이 매우 어른스럽고 성숙해서 어른을 대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떤 이들과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느낌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점점 나이를 그리 믿지 않게 됐다. 나이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그러니 나이로 나를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인도가 전체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도는 우리나라 못지않게 나이를 중시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활해 온 그곳의 환경의 그러했다. 나는 갓 스무 살이 된 친구들부터 20대 후반에 가까운 친구들이 많이 있다.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친구들과도 이야기하다 보면 나보다 훨씬 의젓하고 진지하고 성숙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내가 내 나이를 굳이 상기하게 되는 때는 고국에 돌아와서 있을 때뿐이다. 어디를 가나 나이를 묻는다. 나이를 알게 되면 나이가 주는 정해진 이미지가 있고,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들이 생긴다. 누군가 그렇다고 콕 집어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알게 된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는 부분에 제약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당신을, 진짜 당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느낀 적이 있는가? 겉모습이 아닌 그 안에 있는 ‘나’ 말이다. 나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느껴본 적이 있다. 내가 아유르베다 의학대학 4학년을 마치고 병원에서 인턴의 로 근무하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한 프로그램이 학교에서 열렸다. ‘Prabhashanam’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으로 1학년 새내기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산스끄리뜨어로 쓰인 아유르베다 경전을 제대로 읽고, 공부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프로그램이다. 아침 6시 경전을 소리 내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필요한 문법을 배우고 그룹으로 나눠 한 챕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10일 동안 진행한다. 이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산스끄리뜨어와 더 친밀해지고 실질적으로 어떻게 원전을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 적어도 그 길을 보게 된다. 나는 4년 6개월이 지나서야 그 길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까지 영어로 번역된 번역서를 활용하면서 시험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공부를 주로 해왔었다. 유급이 되는 일은 반드시 막고 싶었다. 여러 번 유급이 되면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것도 한 이유다. 합격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는 많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진짜 아유르베다를 만났다.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이 나를 보던 눈빛을 기억한다. ‘나’를 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생김새, 인종, 국적 등은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선생님이 ‘나’를 보았고, 그렇게 나는 ‘나’로서 선생님을 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계신 병원으로 갔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즐겁고 행복한 경험만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깊은 터널을 건너야 했다. 그래도 괜찮다. 그런 일은 살다 보면 수도 없이 있어왔고, 있을 것이고 지금도 일어난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나는 '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소중하고 값진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감사하고 감사한 모든 날들이다.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 나는 생명을 갖고 태어났다. 생명은 영혼-마음-몸-감각기관으로 구성된다. 생명이 있어야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유르베다 경전에서는 삶에서 성취할 수 있는 네 가지 삶의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다르마(Dharma); 의무 혹은 옳은 행위, 아르타(Artha); 물질적 대상의 추구, 까마(Kama); 감각적 쾌락과 탐욕 그리고 목샤(Moksha); 깨달음이다. 한 삶에서 생의 시기에 따라 이러한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 여러 생을 거쳐 이러한 삶의 목적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삶을 통해 여러 경험을 하고 배움의 여정을 이어가며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난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든,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든 그것은 결국 어떤 배움을 줄 것이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성장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그리고 믿고 있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내 안에 보이거나 만져지거나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지만 존재하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진정한 자신을 알기 위한 여정에 있는 셈이다. 수많은 생에서 이번 생은 조금 더 가까운 혹은 멀리서 경험하고 배워가는 길에 함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두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렇게 느껴진다고 모두에게 가서 아는 척, 친한 척을 하며 말을 걸 수는 없다.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도망갈 것이다. 그래도 참으로 귀한 인연이다. 내가 내 삶을 응원하고 잘 살아가길 바라듯, 다른 이들의 삶 또한 응원한다.


    이 여정에는 누가 잘하고 못하고 가 없다. 비교가 불필요한 여정이다. 그저 오롯이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삶을 통해 배우고 배움을 바탕으로 삶을 지속하는 연속이다. 어쩌면 살아가는 그 자체로 삶은 충분히 가치 있다. 물론 이 대목에서 여러 동의하지 않는 목소리를 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런 생각과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 물론 당신의 의견도 존중한다. 어쨌든 우리 모두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다. 여기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는 당신도, 어려운 삶의 결정을 앞두고 있는 어딘가의 누군가도 모두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반갑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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