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길 위에 남고, 사람은 그 사이를 지나간다.
점점 골목길이 사라져 가고 있다. 대도시에서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골목이 사라지고 대신에 대단지가 들어서면서 옛 골목길에서 만나던 사람과 이야기가 점점 소멸돼 가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작은 도시를 가면 옛 기억을 되살릴 수 있어서 좋을 때가 있다. 바다의 도시 통영의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여행자가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이 된다.
이곳에서는 목적지가 중요하지 않다. 어디로 가느냐보다 어디를 지나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여행길이다. 햇살이 낮게 깔린 골목, 담벼락을 타고 내려오는 그림자,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는 작은 의자 하나. 때로는 담쟁이덩굴에서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연상케 만들기도 한다.
골목이라는 이름의 시간 통영의 골목은 단순히 오래된 길이 아니다. 그 길은 누군가가 매일 오르내리며 닳아진 계단이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기억을 남긴 공간이며, 어른들이 하루를 정리하며 지나가던 길이었다.
벽에 그려진 꽃 한 송이도 그저 장식이 아니라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방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곳의 골목은 관광지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삶이다. 그래서 더 조용하면서 그래서 더 깊다.
충렬사는 이곳은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하지만 이곳에 서면 단순히 ‘기념’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붉은 홍살문을 지나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어든다. 이번에는 충렬사를 방문해보지 않고 겉에서만 보고 지나쳐간다.
그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하루였고 누군가의 삶이었을 것이다. 여행지의 풍경은 대부분 소비되지만 이곳의 풍경은 쉽게 소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골목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머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바깥의 골목이 ‘삶의 흐름’이었다면 이곳은 ‘시간의 정지’에 가깝다. 멈춰 있는 공간 안에서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통영의 곳곳의 박경리의 문장처럼 남는 것들이 있다. 통영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제 물이 흐르던 자리였던 통영 명정으로 가본다.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통영 명정(統營 明井)에 닿는다. 이곳은 오래된 우물이다. 하지만 ‘단순한 우물’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위쪽의 우물은 식수로, 아래쪽의 우물은 생활용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그 우물 앞에 서서 물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사람은 사라지지만 사람이 사용하던 공간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 바로 앞에는 시간을 모시는 공간, 충렬사가 있다.
박경리. 그리고 그녀의 작품은 토지가 대표적이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항상 시간을 견디며 살아간다. 크게 말하지 않지만 그들의 삶은 묵직하게 남는다. 통영의 골목도 그렇다. 이곳은 큰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이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같은 물이지만 쓰임에 따라 나뉘었던 구조가 생활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 단순한 구분 속에서 당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보인다. 물을 길어 올리던 손, 물을 나르던 발걸음, 그 물로 이어지던 하루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고요하게 남아 있지만 이곳은 분명 한때 수많은 삶의 중심이었다.
소설은 더 현실적이어서 더 생각하는 것을 많이 만들기도 한다. 그 ‘살아감’이 쌓여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필자는 골목을 걸으며 소설 속 한 문장을 떠올린다.
“삶은 결국 지나가지만, 그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골목은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명정에서 나와서 보면 언덕이 나온다.
골목은 아래에서 시작되고 이야기는 위에서 정리된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서피랑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를 향해 올라가는 중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통영의 서피랑이나 동피랑과 같은 곳이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명정을 지나 골목을 빠져나오면 멀리 언덕 위로 서피랑이 보인다. 여러 번 올라가 본 적이 있어서 정겨운 곳이기도 하다. 골목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높은 곳에서는 보일 것이다.
통영은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느낌의 도시다. 빠르게 소비되는 여행이 아니라 천천히 쌓이는 여행이 어울리는 곳이다. 그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이 여행은 어딘가를 ‘보는’ 여행이 아니라 무언가를 ‘느끼는’ 여행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