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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0. 2017

윈터홀릭

매혹적인 공주 제민천의 겨울

성지를 따라 걷는 것을 보통 순례라고 한다. 걷는 것은 똑같지만 목적에 따라 이름이 다르게 붙여진다. 생태가 살아 있는 공간을 찾아가는 것을 탐방이라고 하고 가볍게 가까운 길을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산책이라고 하고 그냥 멍하니 걷는 것은 방황이라고 한다. 걷는 것에도 이유가 있고 의미가 따로 있을까. 그냥 걷는 자유가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공주를 가로지르는 것은 금강이지만 공주 속에 스며든 것은 제민천이다. 가로질러가는 강을 같이 걸으며 사색하는 것보다 자그마한 천을 따라가는 것이 걷기에는 더 좋다. 공주의 겨울 제민천길은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만이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다. 

매일 아침이 되면 남편인 영감의 목이 마를까 봐 물을 떠 오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오래 산 부분의 정이 느껴진다. 제민천을 걷는 길은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은 없지만 소소한 볼거리가 있는 곳으로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걷는 것이다. 단지, 그뿐이다. 

시와 그림, 사진 등이 다리 밑의 공간에 걸려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기술이 있다. 바로 걷는 것으로 지나가는 행인도 시간도 느릿느릿 흘러가는 가운데 걷는 것만이 유일한 여행의 기술이다. 

지금 내 앞에 

당신 마주 있고 당신과 나 사이

가득 

음악의 강물이

일렁입니다.

당신 등 뒤로 

썰렁한 잡목 숲도 

이런 때는 참

 아름다운 

그림나라입니다. - 나태주 

제민천을 걷는 길에서 지루해지면 위의 공주 구도심으로 올라가면 된다. 겨울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빨간 열매 같은 것이 눈길을 끈다. 시간을 가지고 걷는 길에서 만난 여유로움을 거름 삼아서 다시 시작되는 다음 주의 바쁜 일상을 건져내는 힘을 가지게 된다. 

어렸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책을 읽었지만 어릴 때 가졌던 특유의 상상력은 쉽게 회복하지 못한 것 같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어른들의 지혜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닐 때가 있다. 한 겨울에 함박눈이 내려 이곳이 하얗게 변할 때 다시 와서 걸어보고 싶다. 그때는 동심이 살아날지도 모른다. 

겨울 해는 무척이나 짧아서 어느새 제민천 천변길에는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추억과 여유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떠날 때가 되면 아쉬움이 남는 법 볼거리가 많아서라기 보다는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제민천의 밤거리를 걷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이곳에서 느꼈던 감정의 여유로움이 아쉽기만 하다. 옷깃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무척이나 쌀쌀하지만 그것 또한 겨울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떠난다. 


나도 이제 다른 일상으로의 출항을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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