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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6. 2017

비움의 미학

원주 법천사지

보통은 시대를 아우를만한 중심지의 대사찰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의 일부만 남아 있는 곳을 사지라고 부른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이라고 남아 있으면 사찰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건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일부 석탑이나 그 터나 기단석등만이 사찰이 있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원주의 삼대 사지를 꼽으라면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다. 그중에 법천사지는 신라 말기의 원주 일대의 대표적인 사원으로 지금 발굴되고 있는 현장만 보더라도 그 규모를 예측하게 한다. 

대사찰이었던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법천사지에는 국보 제59호인 지광국사탑비와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탑,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0호인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을 법천사지는 고려 중기의 법상종 사찰로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은 통일신라 928년(경순왕 2년)으로 이후 고려시대에는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던 사찰이다. 건물은 모두 사라졌지만 오히려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의 미학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조선초에는 유방선이라는 학자가 머물면서 제자를 가르쳤는데 한명회·서거정·권람이 그에게서 배웠다.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중심에 남아 있는 고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법천사가 생겨나기 전부터 이곳에는 언제나 저 나무가 있지 않았을까. 위대한 사람의 핏줄이 자손을 통해 이어지듯이 나무의 혈통 또한 시대를 타고 씨앗에 씨앗을 거쳐 후대로 이어진다. 비움의 미학으로 모든 것이 비어져 있는 법천사지에 올곳이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폐사지 순례의 풍성함을 더한다. 

만물이 생성하는 봄이 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궁금해지는 나무다.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는 여전히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를 보며 이런 말을 한다. 


"푸른 세상에서시선을 돌려 모든 것이 메마르고 추운 곳을 보시오! (Turn your face from the green workld, and look where all seem's barren and cold!)"

고목의 안쪽으로 들어와보면 안이 텅 비어 있고 세 개의 나무 기둥이 하나의 공간을 이루며 지탱하고 있다. 올해는 법천사지의 지광국사가 서거한 지 950년이 된 해로 추모제가 열렸다. 법천사지에서 고려 시대 '국사'(國師) 법계를 받은 지광국사 해린(984∼1067) 추모제와 문화행사가 열리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건물이 많았던 사찰이라 여러 가지 모양의 기단석 같은 것이 모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원주에 있는 비움의 미학이 있는 사지들은 신라 경문왕대와 고려 광종대(거돈사), 고려 태조 왕건대(흥법사), 고려 문종대(법천사)에 가장 융성했다. 원주에 대사찰이 집중적으로 세워진 데에는 원주는 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하며, 육로를 통해 충청북도 남부, 경상북도, 강원도 영동지역과 연결되고, 수로로 남한강을 통해 경기도, 충청북도, 강원도 영서지방과 연결되는 지정학적인 위치에 기인한다. 

탑전지는 높게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왼쪽의 건물 터 위에는 기둥을 받치던 돌인 주초석, 불상의 뒤를 장식하던 광배, 탑도석등이 남아 있는데 이곳 부근에 모아놓은 상태이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석축 위에 있는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는 거북 모양 받침돌에 오석으로 만든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 머릿돌이 얹어져 있다. 몸돌 측면에는 승천하는 용이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어 있고 사찰의 만자가 아닌 왕자를 새겨 고려 왕실이 당시 지광국사를 상당한 수준으로 예우했음을 알 수 있다. 

법천사지에서 아래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면 절의 입구에 세워져 있었던 법천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법천사지의 대지면적도 상당한데 당간지주가 있는 곳까지 포함한다면 사찰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임을 상상해볼 수 있다. 비워져서 아름다운 곳 법천사지의 시간은 이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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