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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9. 2022

익산 미륵사지

백제를 오래 기억하기 위한 터닝포인트의 석탑

백제는 어떤 나라였을까. 패망의 나라, 의자왕, 삼천궁녀, 계백의 투혼,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런 나라로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백제의 역할은 상당히 컸었다. 백제가 패망하는 시기에 벌어진 백강 전투는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해전이었으며 그 당시로만 본다면 세계대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핏줄을 지닌 호방한 국가였다. 호방했지만 당시 국제정세를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한 의자왕으로 인해 패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660년 의자왕은 당나라가 바다를 건너 이 땅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신라로 인해 당나라와의 교류가 끊어지면서 그 움직임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못했던 것이다. 부여에 있는 사비라는 수도 그리고 익산은 백제의 부흥을 알리기 위한 대찰의 대상지로 정해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익산 미륵사지라는 사찰의 흔적이 있었던 곳이다. 드 넓은 땅에 현존하는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석탑의 대명사인 미륵사지  7세기 백제의 석탑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목탑보다 석탑이 만들기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책 속에서는 탑의 한쪽 옥개석들이 아래로 기울어 무너지는 듯한 모습으로 탑의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그 위태로운 부분이 콘크리트로 덧씌워져 있는 모습으로 기억이 되었다. 원래 9층이었던 이 탑은 17세기 전후에 무너져 내렸으며 꼭대기 3개 층(7~9층)은 모두 사라졌고 1~6층도 4개 면 가운데 3개 면의 상당 부분이 무너졌다. 

해가 저물어가는 때에 찾아가 본 미륵사지 석탑과 노을은 백제의 옛 영화가 저 너머로 넘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최대의 사찰인데 무왕 하면 마를 캐던 왕자의 이야기로 선화공주와의 사랑꾼 이야기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는 사랑이 곁들여지면 관심을 더 기울인다. 무왕은 의자왕의 아버지로 선화공주와 인연을 맺기 위해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다. 

동쪽은 동원(東院), 서쪽은 서원(西院), 중앙은 중원(中院)이라는 개념의 삼원식(三院式) 가람 형태의 미륵사에는 동탑(東塔)과 서탑(西塔)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木塔)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금판 앞뒷면에 194자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에는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선화공주와의 사랑이야기에 더 많은 애착이 간다. 선화공주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들게 한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에도 정림사가 있었지만 무왕은 아래에 위치한 익산에 미륵사라는 대찰을 만든 이유는 바로 백성들에 대한 사랑과 선화공주 그리고 미래를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큰 사람은 할 것이 많은 법이다. 

익산시가 ‘2022~2023 익산 방문의 해’를 선포하고 관광도시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 있는 미륵사지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미륵사지를 보고 나오는 길에 연못에 비친 나무들이 정확하게 반영을 이루며 물속에 그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미륵사의 창건설화에서는 무왕과 왕비가 이곳 부근으로 찾아가는 길에 산 아래의 큰 연못에 이르렀다고 한다. 발길을 잠시 멈춘 사이에 연못에서 미륵 삼존불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미륵 세상의 출현을 기대하게 하는 의미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연못 앞에서 미륵 삼존불을 기다렸는데 역시 아무 때나 나타는 것은 아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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