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에 행복은 숨겨져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왔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가 대두하게 된 이유에는 바로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의 소망이 제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엇이 우월하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현실에서 만들 수 없는 세상을 여전히 꿈꾸며 살아간다. 최근의 가상화폐 열풍으로 벌어진 모든 일들 역시 사소한 것에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더 큰 행복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힌 채 한쪽으로 휩쓸린다.
지구에 있는 환경자원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주장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아직까지는 잘 돌아가고 있다. 영화는 지구의 환경오염과 자원의 한계에서 출발한다. 전쟁에 의해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 이상 자원의 한계를 어떤 식으로든 극복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인간의 크기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면 우선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다운사이징된 인간들과 원래 크기의 인간들과의 사회에는 갈등이 없을까.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순진 그 이상 생각의 한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다운 사이징 되며 살아가게 될 레저랜드 세상이 색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미 이런 삶을 꿈꾸며 일부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크기는 그대로이지만 화폐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곳에 가서 사는 방식을 말한다. 한국을 기준으로 말하면 필리핀이나 베트남을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곳에 가서 사는 사람들의 일부만 행복하다. 왜냐하면 현지의 자산을 모두 정리하고 가서 일을 안 하고 살겠다는 생각부터가 문제 대응능력에 대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계산한다고 하지만 삶은 그렇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류를 위해 혹은 지구를 위해 작은 사이즈에 만족하면서 살아갈 것 같았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빈부의 격차가 있었고 사람의 삶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작아지려고 결심한 이유는 지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환경을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지금 가진 자산을 가지고 작아지면 편하게 살 수 있는 돈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문제는 그 짝을 만나기가 힘든 그 세상에서 폴은 작아지지만 부인은 갑작스러운 심경변화로 결국 이 둘은 헤어지게 된다.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고 작아진 그 세상에서 변한 것은 없었다.
우리는 큰 것에서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사소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나친다.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큰 것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원하게 된다. 오늘도 살아 있음에 행복하고 크지 않은 것을 선물했을 때 기뻐하는 모습에서 모든 행복이 있다. 순간순간이 이렇게 지나간다. 잠을 자는 시간도 행복하고 무언가를 새로운 것을 보고 왔다는 생각에 행복하다. 누군가를 위해 빌어본 것이 참 오래간만이다.
모든 사람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즐겁게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자신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