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진화는 옛것이 아니다.
인간은 오랜 시간 진화를 시작하여 오늘의 문명을 이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힘만으로 지금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진화를 만든 사람들은 극히 일부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기술을 공유하고 혜택을 누렸을 뿐이다. 역사를 배울 때 오래된 석기를 구석기, 새로운 석기를 신석기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한자로 된 것만으로 그 의미를 아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단어만으로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뗀석기는 구석기시대의 석기 제조 기술로, 돌을 깨서 날카로운 면을 만든 것, 신석기는 돌을 갈아서 날카로운 면을 만든 석기는 간석기라고 바꾸었다.
뗀석기, 간석기, 청동기 등을 보통 선사시대라고 부른다. 선사시대(prehistory)는 문자를 사용하는 역사시대(history)와 대칭되는 개념으로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는 문자가 없으므로, 전적으로 지상 또는 물밑에 남겨진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공주와 대전을 오가는 중간에 발굴된 유적지 석장리 유적은 한반도에 구석기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지다.
지난달 이곳은 석장리에 대한 유적을 대대적으로 단장하고 새롭게 오픈하였는데 예전과는 많이 바뀌기도 했지만 돌을 떼서 생활했던 그 시대상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바뀐 석장리 유적지는 선사인들은 자연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갔기 때문에, 의·식·주가 중심이 되는 문화를 복원하기 위해서 당시의 환경을 다루는 생태학적 기반으로 구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대로 유지된 석장리 유적지의 박물관과 느낌이 많이 바뀌었다. 유적·유물의 형태적 분석, 분포 관계를 밝히는 지리적 분석 등이 잘 드러나게 구성하였다.
인간은 두 발로 걷고 손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 특별해지지는 않았다. 수많은 종들이 나오고 사라지면서 살아남은 인류는 자연 속의 무언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사용해오면서 진화해왔다. 공주 석장리 첫 구석기가 발굴된 것은 1964년으로 프랑스의 아라고인 유적 발굴과 그 해를 같이 한다. 중국 북경원인 주구점 유적 발굴은 1935년으로 조금 더 빨랐다.
돌을 쪼개서 만든 것 중에 긁개는 짐승 가죽에 붙은 살을 긁어낸다거나, 나무껍질 따위를 벗기는 데 사용했고, 찍개는 동물의 뼈를 찍거나 거친 나무를 다듬는 데 사용했다. 주먹도끼는 손에 쥐고 쓸 수 있는 도끼의 형태로 짐승을 사냥하거나 털과 가죽을 분리할 때 사용했으며 슴베찌르개는 나무 막대에 묶어 창을 만들어 사냥하는 데 사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초기 인류의 발자국으로 알려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흔적은 약 370만 년 전 아프리카 탄자니아 라에 톨리 지역에서 나왔는데 두뇌 크기는 침팬지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현재의 우리처럼 서서 직립 보행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무도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은 할 수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돌뿐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석기만을 가지고 논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돌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역사학자가 아니라서 이것이 인간이 어떤 목적에 사용되었는지 아는 것도 또 하나의 혁신이었을 것이다. 모든 석기에 대해 무게나 비중, 다른 유물들과의 상호관계와 석기의 빛깔 등을 알아야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돌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축이나 예술 등의 관점으로 보는 수석 등에 국한되지만 당시 뗀석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재질의 돌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돌감의 차이에 의해 모양도 다르고 떼어지는 모습들도 달라진다.
구석기인들도 예술을 알았을까. 지금의 예술이라는 개념을 알고 돌 등에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피카소는 "어느 누구도 알타미라의 동굴벽화처럼 그릴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를 평하기도 했다.
석장리 유적지 같은 선사시대의 종말과 역사시대의 발생은 도시·문명·국가의 발생(도시 혁명, Urban revolution)과 아울러 문자의 출현을 기준으로 볼 수 있는데 가장 빨리 나타난 시기는 세계 최초의 수메르 문명이 나타나는 서기전 3,000년 경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