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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17. 2018

일본의 황궁(皇居)

일왕이 거주하는 공간은 이런 모습

황궁은 일왕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이며 일본의 강국 발판을 만든 공간이기도 하다. 일부 공간만 공개되어 있는 이곳으로 이전해 온 것은 1969년이고 한 해 전인 1868년 4월 6일, 일본 메이지(明治) 천황은 교토(京都) 황궁의 정전인 시신덴(紫宸殿)에서 대신들을 거느리고 하늘과 땅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막번(幕藩) 체제를 대신할 입헌군주국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한다.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진입하기 위해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바꾸자는 목표를 세웠다.

오사카 성도 그렇지만 황궁 역시 해자가 만들어져 있다. 오사카성을 가본 분이라면 이곳이 그곳과 비슷한 구조를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꽤 넓은 해자가 황궁으로 건너가는 것을 1차 방어하고 있다.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천황이었지만 천황에게 국가통치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성공하면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기에 필요한 것이었다. 

한국어로 되어 있는 글은 보이지 않고 주의문은 일어와 영어로 되어 있다. 게이트 오픈은 9시부터인데 황궁 내로 들어가는 것은 자전거는 불가라고 표시되어 있다. 물론 반려동물도 같이 동행할 수 없다. 

다리를 건너가는 도중에 주변을 둘러본다. 해자가 저 끝까지 이어져 있고 그 끝에는 도쿄의 현대적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우측에는 견고하게 쌓아놓은 성벽이 눈에 뜨인다. 

드디어 입구에 도달했다. 이곳에서는 가방을 가져온 사람들은 모두 소지품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만약 캐리어를 들고 올 생각이라면 잠시 접어두는 것이 좋다. 일왕이 있는 곳이기에 우선 보안검사를 거쳐야 한다. 

가마쿠라(鎌倉)·무로마치(室町)·에도(江戶) 막부를 거치며 800년 동안 일본을 통치하던 쇼군의 시대가 끝난 것은 일본은 중세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고 기존 기득권이 그 기득권을 잃어버린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끝까지 움켜주고 있을 때 일본은 발 빠르게 움직여서 변화의 흐름에 몸을 실었다. 

주변 정원도 잘 가꾸어져 있고 외부 전경이 운치가 있으면서도 웅장하다. 경복궁이 한옥의 공간이라면 이곳은 자연을 상징하는 곳이다. 백악관이 대통령의 공간을 알리기 위해 일부 개방한다면 이곳 역시 일본 왕실을 알리기 위해 일부 개방하고 있는데 인터넷으로 미리 신청해야 한다.  10:00~13:30(1일 2회 한정 관람, 토 · 일 · 공휴일 · 7월 21일~8월 31일 · 12월 28일~1월 4일 · 황실 행사 시 휴관)

들어가는 입구에서 허락을 받았다는 어드미션 티켓을 받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5시에 이곳은 문을 닫으니 나갈 때 이 티켓을 반환하고 나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일본의 역사적인 건물이나 공간도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막부에게서 힘을 가져온 해가 1867년이고 10년이 지나고 나서 일본은 환골탈태하고 강화도에서 1876년 조선과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맺게 한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고종 황제와 메이지 천황은 1852년생으로 나이가 같다. 고종 황제는 자신의 궁에서 갇히다 시피하며 허수아비 군주로 전락하였지만 메이지 천황은 일본 역사에서 길이 남을 위대한 군주로 자리매김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일본을 바꾼 천황이 머물던 곳을 지금은 많은 외국인과 일본인에게 상시 개방되어 그때의 느낌을 느껴볼 수 있다. 천천히 걸어서 돌아본다. 일본에서 황궁이 가지는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황궁에서 호위와 경비를 맡는 황궁 호위관(皇宮護衛官)의 경쟁률은 올해에 24:1에 이를 정도다. 이들은 일왕 내외의 호위나 황궁의 경비 등을 맡아 일하게 된다. 

이곳에서 거주하는 황실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규칙을 지켜야 했다. 너무 일찍 일어나서도 늦잠을 자서도 안되며 급변하는 사회에서 전통을 어떻게 이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요시히토[嘉仁]의 다이쇼 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정착하였으며 영국과 미국에 협력하는 외교정책이 추진되었으며 대내적으로는 의회 운영이 점차 활발해지고 선거권이 확대된다. 병약한 요시히토 대신에 1921년 아들 히로히토[裕仁] 세자(뒤에 히로히토 덴노)가 섭정으로 정무를 담당하게 된다. 일본의 항복 선언을 했던 천황이 히로히토다.

왕정복고 작업과 도쿄에 황궁을 마련하는 일이 같이 진행이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권력의 핵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중용하고 그는 일본 헌정의 모델을 독일에서 본떠서 덴노가 통치하는 체제를 구축하는데 큰 공헌을 세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를 점령하는 계획인 정한론에 반대한 적이 있지만 결국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가게 된다. 그는 사실 온건파여서 일본의 강경파의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황거에는 일왕이 집무를 보고 거주하는 궁성이 있고 외부인을 접견하는 궁전과 천황의 국사를 보조하는 궁내청, 천황과 황후가 생활하는 고쇼(御所), 황후가 누에를 치는 양잠소, 어류를 연구하고 농사를 짓는 생물학연구소 등이 있다.  서울의 잠실이라는 지명에서 보듯이 왕실이나 황실에서는 누에를 치는 것은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다. 강(江)의 어귀(戶)라는 뜻의 에도(江戸)라고 불리기도 했던 도쿄에는 에도시대에는 전국 최대의 성곽을 가진 에도성이 있다. 수도가 바뀌고 황성이 교토에서 도쿄로 옮겨오면서 이곳은 명실상부한 일본 중추로 성장하게 된다. 

황거의 규모는 궁궐 115만㎡, 바깥 외원 포함 230만㎡에 달한다. 일왕이 살고 있는 황거를 와보는 것은 일본의 산역사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다. 일본의 작가들은 가끔씩 사람의 유형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거칠고 편협하며 굽히지 않는 산악형 인간과 다른 하나는 유연하며 새로움과 진기함에 대한 개방적인 호기심이  있는 해안형 인간이다.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료마를 보아야한다. 료마는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지금도 추앙받고 있으며 근대 일본에서 국가주의가 발전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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