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누군가가 범죄를 저질러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면 어떻게 할까. 보통은 경찰의 힘을 빌어 범죄자를 단죄해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자신이 직접 단죄하는 콘셉트의 영화가 적지 않았다. 필자의 경우 만약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자에 의해 죽는다면 아마 경찰의 힘에 기대지 않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지 간에 똑같은 경험을 하게 해주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느낌만 있다.
영화 데스 위시는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았지만 부르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로 적어도 킬링타임용 이상의 재미가 있다. 세 명의 범죄자는 돈을 노리고 의사 폴 커시의 집을 털기 위해 들어가고 그곳에서 우연하게 사고로 그의 와이프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딸은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폴 커시는 경찰의 힘에 기댔지만 경찰은 그냥 수많은 사람들의 사건중 하나일 뿐이었다.
폴 커시는 우연하게 범죄자를 단죄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가족을 해했던 범죄자들의 단서를 알아내게 된다. 이런 사건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는 쉽지 않지만 테이큰의 리암 니슨처럼 시원 통쾌하게 범죄자를 단죄하며 이웃의 보호자로 떠오르게 된다. 경찰이 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범죄에는 일반적으로 적용이 되지만 앞뒤 가리지 않는 범죄자들에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딱 적당할 정도로 문제가 있다.
법은 사람을 믿지 못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만인에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기에 법은 말랑말랑하지 않다. 그래서 법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한 번 바꾸고 나면 그걸 되돌리기에는 더욱 어렵다. 상위법인 헌법은 상당히 딱딱하고 그 아래에 있는 법 역시 딱딱하고 법률에 의해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는 시행령 역시 딱딱하다. 법은 멀리 있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층의 이득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범죄자를 단죄한 것은 속 시원했지만 조금은 헐거운 설정으로 인해 어딘가 어설픈 것은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입장이고 머리가 잘 돌아간다면 똑같이 하지 않을까라는 감정이입을 해보게 만들었다. 재물이라던가 재산은 얼마든지 복구가 가능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신의 관점으로 본다면 인간사의 죽음이라던가 불행은 의미가 없지만 필자 역시 사람이기에 세속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