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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3. 2018

패배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 당시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나가서 시원하게 말아먹은 해전이다. 개인적인 것에 국한된 것을 보통 실패라고 부르고 조직적인 혹은 군사적인 것을 패배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군사행동에서의 실패는 전략적 실패로 간주되는 반면, 교전에서의 실패는 전술적 실패로 간주된다. 거제도에는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을 조성하여 400년도 넘는 패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패배의 역사도 좋지만 전시관 앞에 조성된 공원을 보는 것이 더 좋다. 덥지만 않으면 좋겠지만 날이 더운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개인적인 능력으로 태양의 위치라던가 지구의 축을 변경할 수 없으니 그냥 뜨거운 햇살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볼 뿐이다. 

 

패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성공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없다. 중간중간에 실패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사람은 성장하지 않고 그것은 조직이나 국가도 똑같다. 그런 실패가 없을 때는 좌절을 경험하게 만드는 속성이 남들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있다. 


칠천량 해전은 1597년 7월 16일(음력)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도도 다카토라 등이 지휘하는 일본 수군에 의해 철저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이 해전의 패배로 인해 조선 조정은 조선 수군의 육군 편입까지 고려했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싸우겠다고 고집하지 않았다면 조선 수군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종 2품으로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한다. 그 아래에는 정 3품의 수군절도사가 있고 그 아래에는 정 4품의 수군우후, 종 3품의 수군 첨절제사, 종 4품의 수군만호들이 있다. 드라마 등에서 이순신 장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직위는 수군만호들이었다. 이들은 통제영-수영-첨사진-만호진의 사령부 위계를 가진다. 


맨 아래층에는 각종 무기를 보관하는 무기창고가 있고 그 위층에는 2명이 한 조가 되어 노를 젓는 노 젓는 격군과 격군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도 따로 만들어져 있다. 

이순신을 백의종군하게 했던 선조는 일본군의 반간계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아주는 척 이순신을 내친다. 이는 일본군 제1군 대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잘 활용하여 이순신을 내치게 하는데 활용한다. 고니시의 속셈과 선조의 속셈이 맞아떨어지자 선조는 바로 그를 내치게 된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는 요시라가 가토의 부산 상륙을 한다고 조선 조정에 흘리면서 선조가 나가서 싸우라고 명했지만 이순신은 전략적으로 패배할 수 있다는 판단에 나가지 않지만 선조는 그를 삼도수군 통제 사직에서 파면하고 한양으로 압송하고 그 자리를 원균에게 맡긴다.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는 조선수군의 죽음에만 있지 않았다. 원균이 이끄는 수군을 물리친 일본군들은 다니는 곳마다 살육과 약탈을 일삼으며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 와중에 조선 수군과 백성들의 코를 베는 것은 잊지 않은 일본군들은 당시 코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은 이 해전 소식을 듣고 왜놈이 바다에 목을 지켜 수군을 쳐서 통제사와 수사가 다 죽었다고 하면서 한 밤중에 홀로 앉아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임진왜란에 공이 있는 무신들을 선무공신으로 임명할 때 1등 공신으로 이순신, 권율과 같이 원균 역시 이름을 올린다.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사가 죽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 난중잡록 정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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