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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8. 2018

죽음

금산 칠백의총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인데 어찌 나라가 온천키를 바라겠느냐." 임진왜란 전에 조선에 와서 야스히로가 조선인의 행태를 보고 한 말이었다. 야스히로는 조선에 자주 출입했던 사신으로 조선에 애정이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에서 사신을 보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옹호하는 듯한 말을 했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까지 모두 몰살당한다. 


금산읍으로 들어가는 도로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금산 칠백의총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영규대사와 조헌이 이끄는 의병이 금산성에서 중과부적의 왜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모두 전사한 것을 기리며 당시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 칠백 의사총이라 부르고 오늘에 이르렀다.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그 정도가 살아 있어야 한다.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하려다가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고 의주에 피난 조정을 설치하고 명나라의 도움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금산의 이치와 금산성에서는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군이 전멸하기 4일 전 금산 이치에서는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북 현감 황진이 이끄는 군이 지키고 있었다. 1천여 명의 조선군으로 고바야키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2천여 명을 저지시키며 전라도로 진입하려는 그들의 계획을 저지했다. 그러나 4일 뒤 금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모두 전멸하고 그들의 혼이 이곳에 묻히게 된다. 

서민들의 상당수가 공무원이 꿈인 세상에서 희망을 찾아볼 수 있을까.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하는 법조인을 개인 출세의 대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면 법조계의 뿌리 깊은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선조가 몽진을 하고 빈 한반도를 지킨 것은 죽음이라는 것에 직면하고서도 이 땅을 지키겠다는 백성들의 의지였다. 

1603년(선조 36)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년(인조 12)에는 순의단이 설치되어 해마다 제향을 올렸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찾아온다. 죽음이 언제 오는지 어떤 방식으로 오는지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모를 뿐이다. 인생에서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의병장 조헌과 승병장 영규대사를 제외하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지만 7백 의총이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칠백의총에는 일본 일왕을 상징하는 금송이 심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옮겨졌다. 이곳에 심어진 금송은 1971년 4월 대한민국 예비군 창설 기념행사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것이다. 

이곳에 모셔지고 있는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해 전에 이런 상소를 올린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 명(明) 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조헌은 옥천에서 상경, 또다시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 사신을 목벨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헌은 서인(西人)의 입장을 강경하게 유지해 이이와 성혼을 지지하면서 강경한 상소를 많이 올린다.  집이 몹시 가난해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지속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 좋은 방향을 제시해준다. 


"10월, 유정이 순천의 적 진영을 공격하고 통제사 이순신은 적의 구원병을 바다 가운데 크게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고니시 유기나가는 성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부산, 울산, 하동의 바닷가에 주둔하고 있는 적들도 모두 물러갔다." 


금산성에서 조선 의병 700여 명을 몰살시킨 왜군은 그렇게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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