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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8. 2018

역사

초남이성지

어떤 일이든지 간에 시작이라는 것은 항상 있다. 양반들의 고장이었던 영남은 비교적 천주교가 늦게 퍼져나갔다. 당시 기득권이었던 양반의 입장에서는 평등한 권리를 외치는 천주교를 굳이 받아들일 이유가 적기 때문이기도 했고 유학의 고장이 충청도지만 조선 말기에는 권력은 영남을 기반으로 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럼 호남은 어떨까. 호남의 완주군에 가면 1784년에 호남 천주교 발상지인 초남이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유중철과 이순신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 의해 동정부부로 연을 맺었지만 결혼 4년째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됐다. 이곳 초남이 성지는 이들 부부가 살았던 장소다.

 

이들 부부의 이야기는 동정부부 요안과 루갈다의 거룩한 신앙과 사랑을 본받기 위해 2001년부터 시작한 ‘요안루갈다제’로 만나볼 수 있다. 천주교인을 비롯해 지역민, 관광객이 함께 누리는 ‘신앙유산의 전주 문화콘텐츠화’의 첫행보의 주체는 아쉽게도 초남이성지가 있는 완주가 아니라 전주다. 

초남이 성지로 찾아오는 길은 떠들썩하게 걷는 걸음의 여행지라기보다는 침묵에 잠겨서 묵상하듯이 걷는 걸음이 어울린다. 순례길은 멋진 풍광 대신에 천주교의 씨앗이 이 땅에 떨어져 발아하던 때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이기에 조용하면서 차분한 것이 좋다. 

초남이성지는 파가저택이기도 한데 대역죄를 저지른 국사범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3대를 멸하는 조선왕조 500년 사에 가장 큰 형벌로서 이조실록에서 근거를 찾아 이곳이 유항검의 생가터라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동정부부의 유중철은 바로 유황검의 아들로 초남이성지는 유황검이 살았던 생가터로 1784년 이승훈에게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내려와 가족과 가속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유황검은 같은 해 9월 17일 전주의 풍남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의 성당은 필리핀에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따뜻한 나라여서 굳이 난방을 하지 않고 이렇게 공개된 곳에 성당을 만들어놓은 곳들이 많다.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반상질서가 엄격했던 유교 질서와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시대의 전환과 사상의 전환이 동시에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유황검의 일가중에 7명이 순교하였는데 아들 유중철을 비롯하여 이순이, 유문석, 유중성 5명은 시복시성 절차중에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굳이 순례길을 만들어놓고 걷는 것보다 발가는대로 마음 가는 대로 제 가고 싶은 대로 걷는 것이 좋다. 가슴속에 답답함이 있거나 여정이 끝난 후의 만족감을 느끼고 싶다면 삶을 부여잡고 있는 끈을 잡시 느슨하게 만들고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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