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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30. 2018

갈천서원

선비들의 머물다 간 곳

서원하면 퇴계 이황이 머물던 도산 서원으로 촉발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보다 훨씬 이전에 세워진 서원이 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세워졌던 고성의 금봉서원은 현재 위치로 옮겨진 후에 갈천서원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때가 1712년(숙종 38)이다. 옮겨질 때 모신 분은 이암(李嵓)·어득강(魚得江)·노 필(盧㻶)으로 다른 서원과 동일하게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강당·신문(神門), 5칸의 고사(庫舍), 외문(外門) 등이 있다. 묘우의 중앙에는 이암, 왼쪽에는 어득강, 오른쪽에는 노진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맹자의 말에서 모든 학문 혹은 인생은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많은 능력이 쌓이면 몇몇 계단을 뛰어넘고 올라갈 수도 있다. 

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비가 갈천서원앞에 자리하고 있다. 대체 무얼 저곳에 새겨놓았던 것일까. 희미한 글자만이 남아서 그 흔적을 여행자에게 전하고 있다. 선비들은 다른 사람보다 절경을 좋아했다. 절경은 많은 느낌을 주고 색다른 경험을 부여해준다. 즉 머리가 조금 더 깨일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도 아니지만 의외의 곳에서 옛사람의 흔적을 찾았다. 이곳에 추모된 사람인 주벽 이암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고려 말인 1313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왕을 따라 남행하였는다. 고려의 최고 벼슬이라는 문하시중으로서 서북면도원수가 되기도 했으나 겁이 많아 군사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여 교체되기도 했다. 이교 역시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성이며 그의 가문은 누대공신재상지종이 되어 조선 건국과 함께 조선의 명문가가 되었다. 

해가 저무는 때에 찾아온 곳이라서 분위기는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이다. 고려시대 사람 두 명을 제외하고 조선 중기의 문신인 노필은 도관찰사, 공조좌랑, 경상도도사등의 요직을 겸하다가 기묘사화 때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고 고향 고성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중종때 신원되어 직첩을 환급받는다. 

마지막으로 배향된 이득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종 때 진사가 되었고 연산군 때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에 대사간이 되었지만 명종 때 벼슬을 하지 않고 진주로 내려가 살다가 떠났다. 시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연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갈천서원에서 조금은 특이한 사람은 어득강이라는 사람이다. 성품이 담백하고 벼슬하는데 뜻이 없고 재물에도 관심이 없었던 어득강은 문장을 잘했던 사람이다. 

"해서는 안될 것을 하지 않고 욕망해서는 안될 것을 욕망하지 않는 것, 오직 이렇게 하기만 하면 된다." -맹자


갈천서원은 대가면에 있는 서원으로  고려현종(高麗顯宗) 9년(1018년)에 고성이 현(縣)이 되면서 대둔면(大屯面)과 가동면(可洞面), 시달면(時達面)으로 나누어졌지만 1913년 11월 7일에 면이 설치되어 1984년 8월 22일 자 고성군 조례 제88호로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종전 그대로 9개 법정리에 19개 행정리 40개 반으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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