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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3. 2018

치미

하늘의 소리를 듣다. 

국립 부여박물관에서는 충남에서 의미 있는 공간을 알리는 기획전이 있다.  치미라는 단어는 역사나 관련 분야에서 관련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치미는 필자의 눈으로 보면 마치 말과 같은 느낌이었다. 치미는 전통건축의 지붕 용마루 양 끝을 장식하는 기와로 삼국시대에서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부여박물관에서 기획 전시하는 치미 전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후삼국까지 한국 고대의 치미를 만나볼 수 있는 자리였다. 

부소산은 충청남도 부여에서 대표적인 산성이며 절이 있는 곳으로 부소산 서록 폐사지 또는 서복 사지로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42년에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굴조사가 되고 수많은 치미 조각이 나왔다. 벡제의 치미에서는 몸통이 하나가 아니라 상하 2개를 따로 만드러 연결하였으며 치미의 새가 앉는 것을 막기 위해 치미 끝에 설치가 되기도 했다. 

치미만을 가지고 전시전을 여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치미는 우리 역사의 건축물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져 온 것도 사실이다. 

목조건축물에서 일반적으로 암키와와 수키와를 사용하여 지붕을 덮게 되는데 지붕마루는 지붕의 각 경사면을 연결하는 교차점이기에 물이 새기 쉬워서 잘 덮어주고 마루의 양 끝 마무리를 잘해주어야 한다. 치미는 지붕의 용마루 양 끝단을 잡아주고 보호하며 장식 역할도 겸하고 있다. 

보면 알겠지만 치미는 하늘을 향해 펼쳐진 새의 날갯짓과 같은 형상이고 무늬가 새겨지기도 한다. 연꽃무늬나 물고기 비늘무늬 등을 표현하기도 한다. 몸통과 날개가 맞닿는 부분에도 각종 무늬가 만들어지는데 치미는 깃, 종대, 능골, 몸통, 머리로 구성이 되어 있다. 

이 전시전에서는 삼국시대 백제의 부여 부소산에서 발굴된 것과 익산 미륵사터에서 발굴된 것과 부여 능산리 절터 등 쉽게 볼 수 없는 치미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 

치미의 날개 끝 구멍에는 원이나 네모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곳에 막대기나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을 꽂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백제에서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치미에서도 쇠붙이가 꽂혀 있거나 꽂을 수 있는 구멍이 있는데 옛사람들은 위엄을 상징하고 벽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치미 위에 새들이 머물거나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치미를 보고 있으면 마치 이집트의 문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받게 한다. 동시대의 문화를 살펴보면 점토를 사용하여 건축물을 만들었는데 치미 역시 점토 띠를 층층이 쌓아 올린 테쌓기 방식으로 만드는데 테쌓기로 기본 모양을 만든 후 날개를 따로 붙이기도 하고 무늬를 새겨 넣거나 무늬를 덧붙여 장식을 한다. 

치미 제막 몸통 테쌓기 -> 날개 붙이기 -> 종대 및 날개 만들기 -> 완성 -> 자르기 -> 건조 -> 굽기 -> 완성


대형 치미의 경우는 상하 2개를 조립하여 하나로 완성하는데 상하로 잘라서 가마에 굽고 잘라진 단면에는 실이나 끈을 이용하여 자른 흔적이 남아 있다. 

전시전에서 만나볼 수 있는 특이한 치미는 경주에서 발굴된 것으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치미와 유사하다고 한다. 크기가 작고 몸통. 종대. 뒷면에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날개는 계단 모양으로 장식했는데 보이는 바깥쪽만 장식한 것이 중국 당에서 유행하던 치미와 유사하다고 한다. 경주 인왕동 절터 치미는 신라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원 칠 인 인용사 터로 알려져 있는데 단면이 반원 모양인 능골의 일부만 남았지만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의 오래된 건축물에서 치미는 마침표와 유사한 느낌이다. 모든 것을 다 만들고 나서 끝을 마무리하는 치미는 지붕의 용마루 양 끝단을 잡아주고 보호하며 장식적인 역할까지 하는데 절이나 왕실, 관청, 쥐족의 주택에서 사용하면서 권력의 상징으로 길상과 벽사의 상징으로 하늘의 길흉화복을 듣는 역할을 했었다. 


"인종 후비 공예태후 임씨가 태어나던 날 할아버지인 이위가 꿈에서 노란 큰 깃발이 자기 집 중문에 세워져 있는데, 깃발의 꼬리가(고려궁)선경전의 치미에 감겨 나부끼는 것을 보았다. 비가 탄생하자 이위가 이르기를, '이 딸아이는 뒷날 선경전에서 노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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