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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03. 2018

비래동 고인돌

대전에도 고인돌이 있다. 

대전에는 산성이 수십 개가 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도 했지만 고대국가의 주요 도시가 자리하지 않았기에 옛날의 흔적은 많지는 않은 편이다. 조선시대에 사람들의 많은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유성구의 진잠과 대덕구의 회덕 정도였고 그 외에는 사람이 살았던 유적이 많이 나오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생각 외로 구석구석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은 남아 있었다. 아래 지방에 내려가면 전라도에 고인돌이 무리를 지어 있는 수많은 곳을 가본 기억이 난다. 

대전 대덕구 비래동에는 두 개의 고인돌이 남아 있는데 고인돌 1호는 780cm * 440cm 정도의 범위에 잡석 및 황갈색 점토를 약 0.5m ~1m가량 높이로 쌓아 올린 뒤 매장 주체부인 석곽이 축조되어 있고 그 뒤로 2호 고인돌이 있는데 비래동 고인돌에서 나온 비파형 동검은 금강 유역에서는 최초의 예로, 함께 출토된 석촉 등의 형식으로 보아 시기는 약 B.C 7세기 ~ B.C 6세기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고인돌의 종류는 탁자식과 바둑판식으로 구분이 된다. 땅 위에 기둥 역할을 하는 고인돌을 세운 후 커다란 돌을 올려놓은 것이 탁자식이고 땅 속에 사각형으로 돌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작은 잡석 등을 깔고 커다란 돌을 올려놓은 것이 바둑판식이다. 비래동 고인돌은 둘 다 바둑판식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로는 제1호 지석묘에서 비파형 동검 1점, 삼각만입화살촉 5점, 붉은 간 토기 1점, 제2호 지석묘에서는 붉은 간 토기 3점, 제3호 지석묘에서 붉은 간 토기 1점, 관옥 1점이 출토되었다.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규모가 있는 부족이 살았다는 의미도 된다. 청동기 시대에 유력 부족장의 무덤을 만들 때 고인돌을 만들기 때문이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에 부족의 규모가 작으면 힘들다. 고인돌 아래에는 부족장의 권력을 상징하는 검이나 거울, 방울 등의 청동기들을 넣게 된다.  한국에는 전 세계 고인돌의 50~50%가 있다고 한다. 

비래동 고인돌이 있는 곳 앞에는 이 마을을 지켜줄 것 같은 보호수가 있는데 이 나무는 느티나무로 수령이 무려 600여 년에 이르는 나무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고성이씨가 많이 살고 있는지 관련 비가 세워져 있었다. 고성 이씨(固城 李氏)는 경상남도 고성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이황(李璜)은 고려 덕종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거란군(契丹軍)의 침입 때 공을 세워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며,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바로 옆에 있는 송촌동에 은진 송 씨 집성촌이 있는데 그 근처에도 이렇게 고성 이 씨 집성촌이 있다는 것도 새롭다. 고성 이 씨의 구전(口傳)에 따르면 반(槃)은 춘추전국시대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어머니 뱃속에서 70년을 있다가 나이 70에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만물의 이치를 모두 깨우치고 있었다고 하며,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나 성을 이(李)씨로 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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