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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6. 2018

관아문

보령의 역사 흔적

보령의 북쪽으로 가다 보면 관심 있게 지켜보면 보령 성곽으로 가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는데 그 역사적인 흔적은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쌓은 봉당성(혹은 고남 산성이 있던 곳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위치에 1430년(세종 12년)에 이미 있던 성을 보강하여 쌓아 만든 성곽과 들어가는 입구를 의미하는 관아문이다. 정면에 보이는 누각의 건물의 앞면에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중종(재위 1506∼1544)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보령은 이산해, 이지함과 매우 연관이 깊은 지역이다. 이지함의 묘가 있기도 한 보령은 한산 이 씨들이 아직도 많이 대대로 살고 있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李之菡)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과거에 급제하고 영의정까지 올라간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兩司: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지만 다시 대제학, 1599년에는 다시 영의정에 올라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던 사람이다. 이산해도 이지함도 보령에서 삶을 영위하기도 했다. 

축성 당시의 규모는 둘레 630여 m, 높이 3.5m였으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파손되고, 남문인 해산루 옆 성벽 약 70m와 북쪽 성벽 약 360m만이 남겨져 있다. 1432년에 제민당ㆍ공아 ㆍ병기고 등 140여 칸 규모의 건물을 지으면서 지역 거점 방어소 역할을 했었다. 지금은 보령의 시골 풍경을 간직한 곳이지만 보령의 중심지였던 옛 모습이 어떠했을지가 궁금할 때가 있다. 

관아라고 하면 지금의 시청이나 도청을 생각하면 되는데 우리말로는 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관아는 관서(官署)·공해(公廨)라고도 불렀다. 지방에서는 경기도·충청도 등 팔도와 그 밑에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두고 도의 관찰사(또는 監司)가 소관 마을을 관할하는 부윤·목사·군수·현령·현감 등을 통괄하면서 지방자치를 주도하였다. 

지방관아의 대표적인 것은 현감이 주재하고 있던 동헌(東軒)이고 현감의 살림채인 내아(內衙)가 있다. 보령 관아문처럼 지방관아에서는 누문으로 된 아문으로 위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보령성곽이 있는 곳의 내삼문은 없어졌지만 남아 있는 보령 관아문처럼 관아의 아문 은 누문으로서 일층은 대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고, 이층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사방에 창호를 달지 않아 주위를 쉽게 관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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