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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6. 2018

서예

제4회 유홍준 교수 기증 유물전

현대인들은 글을 대부분 디지털 방식으로 읽지만 불과 4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글을 읽기 위해서는 손으로 직접 쓰거나 인쇄된 책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글이라는 것은 머릿속의 뇌세포를 단련하기도 하고 유연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이 오래 건강하게 살기 위해 다양한 운동을 하는데 운동에도 단련과 유연한 것이 병행되어야 균형이 맞듯이 머리 또한 그렇다. 서예란 것은 글씨의 예술을 의미한다. 

부여에 자리한 부여문화원에서는 올해로 제4회를 맞이하는 유홍준 교수의 기증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부여를 대표하는 서예가이기도 한 우당 유창환과 일창 유치웅을 만날 수 있는 전시전이다. 부여문화원은 부여의 문화를 연구하고 다양한 전시전을 열어 부여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곳이다. 


부여를 대표하는 서예가인 우당 유창환과 그의 아들은 유치웅은 규암면 함양리에서 태어나 묘소도 부여에 만들어져 있다. 그 마을에는 기계 유 씨 집성촌을 현재도 이루고 있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세상을 더난 우당 유창화은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나며 금석에도 조예가 깊어 선비 사회, 문인 사회에서 크게 존중을 받고 있다고 한다. 특히 초서가 가장 돋보여 호방하면서도 힘차고 유려하였는데 지금까지 많은 묘비와 묘지명을 남긴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일장 유치웅은 초서에서 당대의 대가로 인정받으며 인품과 학식이 높아 정부 수립 후에는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그 두 사람의 서예뿐만이 아니라 집안의 조상 중에서 서예가 뛰어난 사람들의 작품도 한 점씩 곁들여 전시하였는데 정조 때 명필로 백마강 수북정의 현판을 쓴 기원 유한지나 구당 유길준의 서예도 만나볼 수 있다. 

글은 글씨로 표현된다. 지금은 한자를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한자 역시 우리의 문화를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송백 속에 모여서 시를 읊고 새는 지저귀는 가운데 솟구치는 샘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시구가 생각나기도 한다. 

서예와 그림은 둘 다 맥락이 유사하다. 보는 즐거움이 있고 선이 이어져서 완성된다는 점에서다. 옛사람들은 특별한 지인들에게 서예작품이나 그림을 그려서 보내며 교류를 했다. 

"요즈음 대감께서는 잘 지내시고 아드님도 공부 잘하시는지요? 여러 가지로 축하드립니다. 저는 지난달 초에 우연히 왼쪽 부분이 좋지 않더니 종독이 되어 마침내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만, 지금은 조금 나아졌습니다. 마무리가 아직 더디니 정말 우울합니다. 다만 연묵과 자사로 소일할 뿐입니다....


... 죄송합니다. 가까운 시일 내로 뵙고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8월 6일 생 유창환 배백" - 간찰

회화·조각·음악 등이 예술임에는 틀림없으나 ‘예(藝)’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이 부르는 대로 ‘서도(書道)’라고 부르지만 한국에서는 서예(書藝)라고 부르는데 그 역사는 오래되지는 않았다. 

서예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김정희로 글씨에서 가장 큰 혁신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김정희(金正喜)였다. 그는 서법의 근원을 전한예(前漢隷)에 두고 이 법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추사체를 만들어냈다. 김정희의 독창적 서법은 너무나 파격적인 것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시도는 항상 거센 저항에 직면한다. 

서예전이 열리고 있는 옆에는 다양한 도자문화가 담긴 소박한 전시전도 있으니 둘러보는 것도 좋다. 

부여를 대표하는 서예가 두 명의 작품을 보면서 서예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광복 이후 한자교육 부진으로 한자를 바탕으로 존립, 발전하여 온 서예의 입지조건은 취약해졌고 이로 인해 서예의 질적인 향상은 정체상태에 있으며 소수의 서예가들만이 한국 현대 서예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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