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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31. 2019

유봉 영당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기를...

논어와 맹자는 주로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대학과 중용은 유학의 도덕과 형이상학에 대한 이론서다. 논산에 가면 여행지이면서 대표적인 고택으로 윤증고택이 있다. 그러나 실제 실리적인 유학자 윤증은 그곳에서 거주한 적이 없다. 소박한 고택인 유봉 영당이라는 곳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윤증고택은 양반가의 고택을 연상시킬 만큼 잘 지어졌다. 소론의 대표적인 학자인 윤증의 제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만들어주었지만 거창해서 거부하면서 들어가서 살지 않았다. 


유봉 영당으로 가는 길에는 병사 저수지가 있는데 병사 저수지를 걷다 보니 강아지가 졸졸 따라오기 시작한다. 인조가 청나라에 고개를 숙이며 패배를 인정한 삼전도의 굴욕 당시 윤증은 실리적으로 옹호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삶 속에서 길을 찾아야 된다고 본 것이다. 조선시대 당대의 최고의 실력자이며 유학자인 송시열은 22년 대선배이며 스승이었지만 윤증은 실리를 내세우며 대립각을 세웠다. 노론의 영수이며 실권을 가진 송시열에 맞섰던 윤증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지금은 대덕구의 작은 고장이라고 생각하는 회덕이라는 이름은 지금 동춘당공원이 있는 송촌동 일대와 법동, 회덕, 읍내를  모두 아우르는 회덕현이라는 곳으로 대전의 중심이었다. 회덕에는 은진 송 씨가 터를 잡고 살았는데 송시열이 바로 그곳을 터로 움직였도 지금은 노성면인 니성에는 파평 윤 씨인 윤증이 살았다. 두 성씨 간의 대립각은 지금도 이어지는데 두 성씨의 후손들은 지금도 결혼 등을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저수지를 거니는데 강아지가 계속 쫒아온다.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불화로 인해 발생한 분쟁을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른다. 회와 니는 지역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회덕현의 회와 노성면의 이산의 이를 사용하여 확대되었다. 

임진왜란 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던 붕당은 다시 서인에서 송시열과 윤증이라는 스승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논쟁을 벌임으로써 조정이 시끄러워지고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된 역사적인 분쟁이 회니시비다. 저 앞에 보이는 고택이 유봉 영당이다. 

실리란 것이 무엇이고 배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미련하게 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명나라 양명학의 창시자라는 왕수는 주희가 강조한 격물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집에 있던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대나무만 바라보다가 병만 얻고 대나무의 이치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곳 유봉 영당에서 세상을 떠난 윤증을 후손들에게 유지를 내린다. 손이 많이 필요한 음식과 기름으로 볶아야 하는 전들은 제사상에 올리지 말라고 말이다. 윤증은 노비들에게 재산 소유와 가정을 꾸미는 것이 가능하도록 주거를 제공하는 외거노비를 활용하고 집 밖에 쌀을 놓고 배고픈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유봉 영당의 경승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익공양식으로서, 누마루식으로 조영하였다. 영당은 경승재의 북동쪽에 자리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윤증 사후 1744년(영조 20)에 이르러 윤증 문인들이 스승의 영당과 경승재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대학의 기본적인 내용은 팔조목에 나오는데 사물을 탐구하고 앎을 확장하며 의지를 성실히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한다. 몸을 닦는다. 집안을 가지런히 한다. 나라를 다스린다.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가 담겨 있다. 인간의 행위 동기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격물치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윤증은 실천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당초 윤증이 강학했던 강당은 1940년경에 헐리고 주초석만 남아 있으며, 현재는 영당과 경승재, 관리사, 그리고 아래채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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