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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25. 2019

여흥 민씨 (驪興閔氏)

천안의 민익현 가옥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이 등장한 성씨 중에 여흥 민 씨가 있다. 여흥민씨(驪興閔氏)는 고려시대 상의봉어(尙衣奉御)를 지낸 민칭도(閔稱道)를 시조로 하는데 가문의 위세를 떨칠 때 조선왕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현왕후의 동생인 민진원(閔鎭遠)은 1691년(숙종 17) 문과에 급제한 뒤 영조 대까지 병조정랑·사복 시정(司僕寺正)·전라관찰사·우의정·좌의정·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민치록(閔致祿)은 딸이 고종의 비가 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에 봉해졌고, 민치록의 딸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 대립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천안의 북쪽으로 올라가면 천안에서 몇 곳 안 되는 고택중 민익현 가옥이 나온다. 여흥민씨인 민승세는 규장각 대제학을 지냈는데 직산으로 낙향하여 지은 집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안채는 'ㄱ'자 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안쪽에 보면 광서 16년 경인윤이월십율일'이라고 상량한 날이 남아 있어 건축 연대가 1890년(고종 27) 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가옥의 이름인 민익현의 아버지인 민재기는 일제강점기에 친일을 하며 재산을 많이 수탈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민 씨인 민병욱은 시흥 농민봉기 때 성우경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고, 민진식은 광명시와 시흥시에서 오랜 공직 생활을 하며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안채는 오래된 상태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안채가 나오다. 민익현의 아버지인 민재기는 친일을 한 것에 직산읍민들은 해방이 되자마자 주변에 있는 벚꽃나무를 모두 찍어서 없애버렸다고 한다. 

여흥민씨는 대대로 교목세가로 고려에서 조선까지 상류층으로 살아왔다. 여흥민씨들은 다양한 곳에서 활동을 했다. 올해는 독립운동 100주년의 기념이 되는 해로 일제강점기 때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 집에서 거주했던 민재기는 친일을 했던 것에 그의 아들이 반성하며 사회 봉사 활동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그의 아들인 민태호가 사회 봉사 활동을 이어하고 있다고 한다. 

오래된 집이지만 남아 있기에 그 당시의 역사와 유래를 살펴볼 수 있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일종의 공중도덕을 가지고 있는 상류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노블레스의 품격이라고 한다. 

앞쪽만 정비가 되어 있고 안쪽에는 민익현이 살다가 간 흔적만 남겨져 있다. 집에서 문은 편하게 이동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따른다. 역사에서 문은 흐름에 역행하지 않음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시기마다 역사의 문은 많은 역할을 했다. 먹고사는 일뿐만이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일에 나서는 등의 행동에서도 사람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일련의 움직임을 보여줄 때 빛이 난다. 

이 송덕비인 친일행위를 했지만 그 지역을 발전시키는데 공이 있다고 하여 남겨져 있다. 원래는 동쪽 길 옆에 있던 것을 한국전쟁 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설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문으로 쓰여 있는 것은 '교동공려조합장 민재기 송덕비'다. 


민익현 가옥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2길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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