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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4. 2019

국민에게 중요한 것

2019 안성 3.1 운동 기념관 100주년

이 땅은 누가 살 수 있는 곳인가. 누가 살만한 곳인가. 자식을 기르며 살 수 있는 곳인가. 어떤 이들이 성벽을 만들어 놓고 모든 이득을 가져간다면 그런 곳이 살만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에는 재개 편을 통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득을 챙겼다. 그런 땅에서 주권을 회복하고자 일어섰던 사람들의 공간 안성 삼일운동 기념관을 방문해 보았다. 

평화운동으로만 알려졌던 독립운동을 대한민국에서 무력시위로 힘을 보여준 곳 중 대한민국에서 안성이 유일하다. 힘으로 누르려는 자에게 평화로만 대항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터지만 그 힘에 대항했던 힘들이 있었다. 

민족의 실력양성 및 단결을 목표로 무산자 교육, 풍속 교정, 강연과 토론을 통한 신문화 전파 활동이 안성의 청년층을 중심으로 전개되게 한 시작점은 삼일운동으로 기폭제로 작용을 한 것이다. 안성에서 운동을 한 사람들을 검거하기 위해서  원곡, 양성지역에 조선주차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 제29연대 병력 25명을 파견하여 경찰과 함께 만세운동 참여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고개에 자리하고 있는 운동 기념관이 있게 한 안성의 만세운동은 1919.03.11에 일어났다. 안성에서 일어난 최초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11일, 양성 공립 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양성면 덕봉리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 남진우와 양성면 동리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 고원근이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과 더불어 3.1 운동의 3대 항쟁지로 알려져 있다.  가장 많은 독립 운동가 316명을 배출한 안성시는 3.1 운동 결과 단일 지역에서 가장 많은 127명이 기소되고 최고 12년 형을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4월 1일과 2일, 2일간의 온전한 해방을 이루어냈던 1919년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비폭력 시위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이는 일본의 제약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07년 9월에 조선통감부는 이른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면서 한국인들에게는 총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안성에서 무력시위가 시도되었는데 자취 차원에서 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실내 전시관도 있지만 안성은 야외에서 그날의 시간을 되새겨볼 수 있도록 공간 구성을 해둔 것이 특징이다. 

"일인들은 우리 민족의 문명적인 행동에 대하여 극도로 야만적이고 잔학한 살육을 자행했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이 살육의 진상을 목격하고는 공분에 격하여 우리를 위해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 저들이 비록 여러모로 교묘히 숨기려 한들 어찌 은폐할 수 있겠는가." -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일본에 저항했던 의미보다 신분해방의 사회로 가는 주춧돌을 놓았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군왕과 양반 중심의 계급 사회가 민중이 중심이 되는 평등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을사오적을 비롯하여 일본에 의해 지방의 관리가 된 친일파들은 삼일운동에 참여하지 않도록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재차 말하였다. 

20세기의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혁명의 시대'에서 1789년의 프랑스혁명과 1948년에 이르는 유럽사를 산업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2중 혁명으로 파악하였다. 그렇게 점차적으로 변화했어야 할 한반도의 역사는 삼일운동을 통해 한꺼번에 변혁을 맞게 된다. 그렇기에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여파가 오고 있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였다. 그렇기에 상하이 임시정부 직제는 국무총리 직제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직제에 대통령 직함이 존재하지 않는데 굳이 한글로 대통령, 영어로 프레지던트라고 스스로 불렀다고 한다. 이는 헌법 위에 군림하려고 했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안성 삼일운동 기념관에서는 당신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고난의 장소 서대문형무소가 재현되어 있고 안성의 독립운동가들 중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섰던 사람들은 조선인이 차별받고 착취당하는 것은 일제에 주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들은 당시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 가장 많은 외침은 조선독립만세였다. 아직 대한민국이라는 호칭보다는 조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 국민들이 많았다. 

'태극기'(太極旗)는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이 드러나 있다. 가운데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상징하고 있다. 초기에는 이런 태극기의 모양은 아니었다. 고종은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으나, 국기 제작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아 다양한 모양이 만들지기도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서로 다른 희망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안성 3.1 운동 기념관 : 안성시 원곡면 만세로 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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