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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3. 2019

일을 보는 곳

괴산 청안 안민헌

일을 보는 것과 마실 나가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앞의 것은 조금 더 공정하게 무언가를 처리해야 할 것 같고 뒤에 것은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의 차이다.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은 지방관아의 대표적인 건물로 객사 옆에 자리하며  명칭은 외아가 내아의 동쪽에 있는 데서 연유하였다. 보통 정면 6~7칸, 측면 3~4칸 건물로 전체 평수는 40~50평 정도로 만들어졌던 것이 동헌이다.  방의 앞에 툇마루, 뒤에 누마루와 광을 내었으며 동쪽에 대청을 두고 서쪽에 온돌방과 다락을 두었다. 

 대체로 외아는 상류 가옥의 사랑채, 내아는 안채 구조와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관아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철거되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많지가 않다. 

청안 안민헌의 이 동헌은 청안현의 청사로 쓰이던 곳으로 괴산의 청안이라는 지역은 신라 때에 천연현이라고 하였는데 고려에는 청당현, 조선초에는 도안현을 합하여 청안현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지금은 면의 행정구역으로 일제시대인 1913년에 청안 주재소로 사용되면서 많은 변형이 있었지만 1981년에 원형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직접 가보면 알겠지만 청안 안민헌은 상당히 소박해 보인다. 관청 건물이 화려하다는 것은 세금이 많이 들어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괴산 청안 안민헌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동헌은 성격상 집무를 보는 공간인 외아(外衙)와 수령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내아(內衙)로 나뉘는데 지방에 파견된 목민관이 집무를 보던 곳이라고 보면 된다. 목민관이 그 지방을 평화롭게 잘 관리해야 한다는 내용은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잘 담겨 있다. 


 "백성들은 흙으로 밭을 삼고 관료들은 백성으로 밭을 삼아서 살과 뼈를 긁어내는 것으로 농사를 삼고 가렴주구 하는 것으로 추수를 삼는다. 이것이 습성이 되어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당시 실정을 규탄하면서 수령의 실천윤리를 제시했던 것이 목민심서에 담겨 있다. 


목민심서에서 수령은 언제나 청렴·절검을 생활신조로 명예와 재리(財利)를 탐내지 말고, 뇌물을 절대 받지 말며, 수령의 본무는 민에 대한 봉사정신을 기본으로 삼아 국가 정령(國家政令)을 빠짐없이 알리고, 민의(民意)의 소재를 상부 관청에 잘 전달하고 상부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해 민을 보호할 것을 주장했다.

백성을 살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부친의 임지(任地)를 따라다니면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익혔다고 한다. 18년 동안의 강진 귀양살이를 통해 백성이 국가 권력과 관리의 횡포에 도저히 배겨내지 못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상세하게 살피면서 쓴 목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와 목민을 책임진 지방수령들의 기본자세가 얼마나 숭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목민의 뜻이 담긴 것이 목민심서다. 

안민헌 바로 옆에는 청안 만세운동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3월 30일 그날의 장날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이때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찬의, 연병로, 이태갑, 장성원, 신강면 등은 1977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 되었다. 목동은 보통 양등을 돌보는 사람을 말한다. 백성을 돌보는 사람을 목민이라고 한다. 기른다는 의미의 목민과 심서(心書)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에 글로 남긴 것이다. 애절하게 살피고 싶은 마음으로 앉아야 평화로운 공간의 옛 관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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