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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6. 2019

운강 이강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다.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평리원으로 옮겨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처형되었다.

일평생 이 목숨을 아껴본 바 없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 삶을 어찌 구하리만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 하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 해도 넋마저 사라지랴


한국의 군 역사에서 이강년의 흔적도 담을 만큼 그가 미친 영향은 상당히 크다. 이강년이 오늘날에까지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고, 옷가지나 음식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전투하며 움직이는 유격전 등의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100주년이라서 더 의미가 큰 것일까. 문경을 상징하는 독립운동가 운강 이강년은 1895년 8월 민비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다. 

문경을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대표적인 두 사람을 찾았다. 운강 이강년과 박열이다. 이강년은 13년간 오로지 애국과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활동에만 헌신하다가 1908년 6월 제천 작성 전투에서 적의 탄환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평리원으로 옮겨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처형되었다.

지금은 군대가 체계적으로 조직이 되어 있고 인력수급이나 국방비등의 조달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1907년에 군대가 해산이 되고 나서 군대를 조직해야 하는 주체가 없어졌다. 그럴 때 의병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게릴라 식으로 조금씩 모여서 일제에 공격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운강 이강년은 '속오작대도'를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의병을 통솔하기 위해 부대 편성과 명령체계, 행진법과 금고령(金鼓令) 등 군대 운영법을 적용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仁, 樂寅), 호는 운강(雲岡). 아버지는 기태(起台)인 사람은 바로 운강 이강년은 대대로 벼슬을 하지 않던 집안에서 태어나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독립운동은 무장하여 일제와 저항하려고 했던 군대조직과 행정적인 조직인 임시정부로 양분되어 동시에 진행이 되었다. 1941년 삼일절 22주년에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던 김구와 김원봉은 임시정부 산하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되고 김원봉이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부분적이나마 좌우통합 정부가 수립되었다 

운강 이강년의 독립운동의 흔적은 한국광복군에게로 이어진다. 한국광복군 서약문은 아래와 같다.


1.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체를 희생하겠음.

2.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절실히 추행하겠음.

3.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하고 법령을 절대 준수하겠음.

4. 광복군 공약과 기율을 엄수하고 상관 명령에 절대복종하겠음.

5. 건국강령과 지도 정신에 위배되는 선전이나 정치조직을 군내외에서 행치 않겠음.

2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되고 김구 등의 노력에도 결과적으로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6월 김구 주석이 친일과 분단 세력에 의해 암살되면서 사실상의 역할을 다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은 1919년 4월 13일을 대한민국의 사실상의 정부 수립일이라고 명시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운강 이강년은 이런 날을 간절히 기다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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