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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03. 2019

친일부일배의 처단

개바위 농암장터와 운강이강년의 의병항쟁

상주에서 대전으로 가려면 넘어오는 길목에 문경을 스쳐 지나간다. 그곳에 운강 이강년의 행적이 있어서 살펴보았다. 개바우공원이라고 명명되어 있어서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수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마을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농암 장터가 서는 곳이며 문경을 대표하는 운강 이강년 선생이 을미사변이 일어나던 해에 안동관찰사 등 친일부일배 3명을 처단하고 창의의 깃발을 높였던 곳이다. 

1858년에 문경에서 태어나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김옥균이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했던 이강년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비분강개하여 일어서게 된다. 

개바우공원이라고 검색하면 내비게이션 등에서 검색이 잘 되지 않는다. 아자개장터를 검색하고 오면 그 길목에 개바우공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에 항전을 한 그 공을 기려 18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다. 그의 흔적은 군과 관련된 박물관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지금은 이 주변에 아무것도 없지만 옛날에는 농암 5일장이 서던 곳이다. 이 지역 출신들은 한우물, 동바리, 북실, 말바우, 연천, 농바우, 사현, 갈골, 낙수바우, 화산, 서만, 쌍용등에 대한 지명이 익숙할 것이다.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앞을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 일 것이다. 이곳에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농암1리 냇가에 개 한 마리가 지나가자 종곡리의 괴정 뒷산에서 호랑이가 잡아먹으려고 노려 보내는데 반대편인 성재산 밑에 있던 사자가 노려보면서 견제하면서 서로를 잡아먹지 못했다고 한다. 

계속 일본과 항전하던 이강년은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해 9월 16일에는 싸릿재[杻峙],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故里平), 10월 23일에는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비슷한 시기인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데 이때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경북 동해안과 동남쪽에서는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가 산남의 진을, 평민 의병장이었던 신돌석이 영릉의 진을 이끌었다. 

운강 이강년은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작성(鵲城)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일본군에게 붙잡힌 후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평리원으로 옮겨져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세상을 떠났다. 

현명한 자는 사물마다에 어울리는 이름을 주고,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그 말을 입에 올려야 한다. 이것을 말로 한다면 반드시 사태가 호전되어야만 하고 있는 것이 실현된다. 군자는 자기 생각을 위로 관철하고 소인은 자기 생각을 아래로 내리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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