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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25. 2019

왕비 폐위를 반대하다.

안성 덕봉서원(德峰書院)의 오두인

숙종은 조선왕조 역사상 인기가 많았던 왕이기도 하다. 그 인기는 바로 여자 때문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사랑했으며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 이들을 이용했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에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 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 당하였지만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은 사람이 오두인이라는 문신이다. 

경기도 시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덕봉서원은 1695년 숙종(21)에 세워졌는데 6년 전인  1689년(숙종 15)에 오두인이 국문을 받고 세상을 떠나고 6년 만이다.  죽었지만 같은 해에 복관 되었고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에 제향 되었다. 

초기에 세워졌을 때는 덕봉이라고 사액되지 않았다가 2년 뒤인 1697년에 ‘德峰(덕봉)’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경내의 건물로는 6칸의 사우(祠宇), 10칸의 정의당(正義堂), 동재·서재·외삼문(外三門)·내삼문(內三門)·홍살문[紅箭門]이 보존되어 있다. 덕봉서원은 한 남자를 사랑한 두 여인의 비극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인현왕후가 폐출된 이후에 아이들은 장 씨 성을 가진 옥정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남인이 새 왕비를 등에 업고 조정을 좌지우지하자, 주도권 세력을 서인으로 교체하기로 마음먹는다.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1694)

오두인을 모시기 위한 서원을 만들기 1년 전에 인현왕후가 복위되었으니 폐위에 반대했던 대신들을 적극적으로 복원을 시킨다. 살아 있는 문신들뿐만이 아니라 오두인같이 국문을 받고 세상을 떠난 문신들까지 대거 높은 자리에 추증이 된다. 1694년에 오두인은 영의정에 추증된다. 

장희빈이 자신의 권세를 누린 기간은 5년에 불과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의 뒷배로 권력을 쥐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권력을 잃어버렸다. 류성룡을 필두로 해서 만들어진 정치세력인 남인은 효종의 북벌을 비판하기도 하고 숙종대에는 장희빈을 통해 정치세력을 확대하기도 했으나  채제공(蔡濟恭)이 영의정으로 정국을 주도한 것외에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은 영남을 중심으로 향촌에서 기반을 유지하면서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덕봉서원에 모셔진 오두인은 조선후기 경기도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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