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죽림서원, 임리정, 팔괘정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뛰어난 사람을 찾는 노동시장에서 수요가 많은 사람은 남들이 갖지 못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고 이 사실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보통 한 가지만을 파는 사람을 고슴도치에 비유하고 여러 분야에 지식을 아는 사람을 여우에 비유한다.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에 의하면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안다고 하는데 이는 과거에 국한된 것이고 큰 것 여러 개를 아는 여우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럼 두 동물을 합치면 여우도치가 되는 것이 미래형 지식인이지 않을까.
죽림서원, 임이정과 팔괘정은 모두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다. 김장생이 말년에 낙향(1626년·인조 4년)해 강경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가 죽림서원(황산 서원)이며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임리정(황산정)이 바로 그것인데 송시열은 사계 선생과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어 죽림서원을 중심으로 임이정 반대편에 팔괘정을 짓기도 했다.
죽림서원은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작은 서원이다. 죽림서원은 1626년(인조 4)에 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세운 황산사(黃山祠)가 그 기원이다. 이곳은 1653년(효종 4년) 송시열과 윤선거((尹宣擧)가 만나 주희(朱熹)의 사상을 비판하고 개혁적 사상을 가진 윤휴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논산의 명재 윤증과 송시열을 완전히 갈라서게 만드는 불씨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살다 보면 적법하더라도 부당한 경우가 있고 부당하더라도 적법한 경우가 있다. 그 기준을 잘 세우는 것은 잘 배우는 것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그 철학적인 관점의 확고함도 필요하지만 유연함도 필요하다. 김장생이라는 스승에게서 송시열이라는 제자로 이어졌고 송시열이라는 스승에게서 윤증이라는 제자로 이어졌지만 앞선 관계는 상생이었지만 후자의 경우는 대립의 관계로 변했다.
죽림서원은 호서지방에서 유일하게 당색을 구분하지 않고 당파를 초월해 충청 선비의 소통과 융합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제 죽림서원 옆으로 나있는 길로 걸어서 올라가 본다. 위에는 임리정이 있는데 김장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곳으로 시경에서 두려워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같이 하며 엷은 얼음을 밟은 것같이 하라라는 의미처럼 항상 자기의 처신과 행동거지에 신준을 기하라는 증자의 뜻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적인 폭넓음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점점 더 확신하게 되는데 우리가 일하고 살면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이런 문제들은 여러 영역, 다양한 지식의 범위에 걸쳐 있는데 이는 폭넓은 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여러 영역을 아우르는 시사점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리정은 오래간만에 올라와본다. 앞에 건물들이 없었을 때는 이곳은 상당히 분위기가 좋은 곳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강경포구가 그대로 있었을 때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정자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임리정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왼편으로 보면 2칸이 대청이고 오른편에는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우측에는 반 칸을 안으로 들여 위로는 누마루로 만들고 그 아래에는 아궁이를 만들어 온돌을 덥히기 위해 사용하였다.
성실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폭넓게 배우고, 자세하게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며, 분명하게 변별하고, 돈독하게 행하여야 하듯이 호기심이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으로 활용을 해야 한다.
스승 김장생의 죽림서원과 임리정을 보았으니 안쪽으로 돌아가서 팔괘정을 만나봐야 할 듯하다.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열린 논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열린 논쟁을 위해서는 참가자가 동일한 자연 언어를 구사하고 참가자는 참이라고 믿는 사실만을 서술하고 옹호하며 모든 당사자가 대등한 처지에서 토론에 참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숙의 민주주의다.
팔괘정은 강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 김장생은 제자인 송시열과 열린 논쟁을 했던 사람이지만 송시열과 윤증의 사례로 보면 열린 논쟁을 했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스승의 가르침이 좋아서 우암 송시열은 스승의 정자가 보이는 곳에 팔괘정을 지어놓고 그를 기렸다. 베이컨은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을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좁은 동굴에 생각이 갇혀 버리듯이 개인의 편협한 성향이 초래하는 편견을 이른다. 자신이 받아 온 교육, 영향을 받은 인물, 읽은 책등이 판단을 그르칠 수가 있다.
송시열은 이 정자를 지으면서 창살무늬를 팔괘(八卦)로 꾸몄고, 그로 인하여 정자 이름을 팔괘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금강 변에 남향하고 있는 팔괘정은 금강을 한눈에 바라보며 수려한 경관을 즐겨볼 수 있다. 앞면에서 왼쪽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팔작지붕 구조로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이다
김장생만큼 자신의 제자를 많이 배출한 사람이 있었을까.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 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 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 백(任義伯) 등이며 아들 김집 역시 그의 문하에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계구 신독을 염두에 두고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그 마음이 발(發)함에 모두 예에 맞게 행하여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예학의 기본이다. 사물의 이(理)는 인간의 지(知)와 관계없이 언제나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지를 통하여 인식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신성하게 될 그릇을 알아보는 것에 진정성이 있다.